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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9 ] [이원창 컬럼] 힐러리 클린턴 ,최후의 도전

1947 년 시카고 출생이다. 웰슬리 대학 때부터 힐러리는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학교 설립 140 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인사를 제치고 재학생으로 졸업연사를 맡아, 그 녀의 과감한 주장에 찬사를 받았다.

곧, 알래스카로 직행 캔 공장에 취직 생선을 짜르다가
열악한 작업환경에 분노, 업주를 고발했고, 화가난 업주는
공장문을 닫아버렸다.

1970 년 예일 법대로 진학해서 먼저 와있던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그는 힐러리가 오클랜드의 로-펌에서 섬머 인턴쉽 하는 것을 알고
그 녀를 찾아가 설득해 같이 동거를 시작하게된다.
졸업과 동시에 청혼했지만 그 녀는 이를 거절하고 와싱턴으로 향한다

1974 년 하원 워터게이트 조사단 시절, 클린턴이 다시 청흔했지만 역시 대답은 노!
그러던 차, 그 녀가 DC에서 변호사 시험에 뜻밖에 낙방했을 때
클린턴으로 부터 위로의 급전을 받고 알칸사로 향한다.
무난히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 녀는 클린턴의 세번 째 청혼을 받아
결국 그와 1975 년에 결혼하게 된다.

"Get two for the price of one", 클린턴이 즐겨쓰는 말이다.
백악관 입성했을 때 , 최초로 영부인에게 집무실을 제공했다.
힐러리가 대통령의 파트너로 입각한 셈이다
한 명의 대통령을 뽑았지만 2 명(?)의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 즉
전통적 탑-다운 관계가 아니라 일 대 일의 파트너쉽이 이루어진 것이다.

힐러리는 의료개혁을 목표로 "전국민 유니버설 케어" 입법을 추진했지만
보수세력과 충돌, 그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어서 터진 화이트워터 부동산 투기사건.
백악관 법률자문 빈스 포스터의 권총자살과 섹스 스캔들;
재임 끝무렵의 모니카 르윈스키 백악관 인턴과의 스캔들.
"했다 안했다. 그 증거가 스커트에 묻어있었다"
빌 클린턴은 끝내 위증죄로 탄핵소추까지 갔지만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대통령 퇴임 후 뉴욕 주 채파쿠아로 거처를 옮기자 힐러리는
비어있던 뉴욕 지역 상원직에 도전해서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연임에서도 67 퍼센트의 지지로 당선, 대권에 도전할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부쉬 정권에 지친 미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해결사로 자처하면서 민주당 경선만 이기면 대권은 따논 것이라고 쾌재를 불렀지만, 낙관은 금물이었다.
시카고 초선 상원의원 오바마 (당시 47세)가 대권을 노리는 줄은 몰랐었다.
만만하게 봤다가 결국 당했다.

대권의 승패가 결정된 지 수 일 후 오바마 한테서 전화가 왔다.
"국무성을 맡아달라. 나는 경제가 엉망이라 나라 바깥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제의를 수락, 그 녀는 2009 년 국무장관으로 취임했다.

힐러리는 역대 장관중 가장 많은 국가 112 개 국을 방문, 도합 956,000 마일을 다녔다.
그 녀의 노력으로 미국은 1955 년이래, 버마와 첫 수교를 시작하게된다.
이어서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동남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Smart Power"- 군사적 파워와 문화 물질 지원을 통한
부드러운 강공책-을 도입해서 평화적 공존의 기본을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은 임기 말에 발생한 리비아 밴가지 미대사의 죽음을 핑계삼아 그 녀의 외교적 노력을 깍아내리려 애썼고 그 녀를 가리켜 그저 "오바마의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고 비하하려 노력했었다.
그럼에도 불구 그 녀의 저서 "Hard Choices"에 밝혀진 것처럼
세게 각국의 원수 ,정치 지도자 들과의 직접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그 녀가 쌓은 경험은 그 녀의 세계무대 진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이 제 67 세!
무성한 가지의 깊은 고목이 되어 하늘을 찌른다.
과연 그 뿜어내는 입김은 온 산을 덮어
강을 건너 늪으로 , 산맥을 넘어 바다로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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