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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4-06-30 축구,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축구는 결국 졌습니다. 뜨거운 성원과 응원 속에 열심히 분투했지만, 그토록 원하고 바랬던 16 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러시아 , 알제리아, 그리고 벨기에와 치른 경기를 통해서 저희는 한국 축구가 가진 능력의 허와 실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한국팀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 것은 아닐까? 한국 언론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포장한 것은 아니었나? 아니면, 상대에 따라서 실력의 기복이 너무 심했던 것은 또 아니었나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부족한 기량,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기본적인 능력, 볼 컨트롤 , 패스워크, 개인기가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자랐습니다. 상대 측은 이미 우리 선수가 어디로 어떻게 패스 할 것인지, 공격할 것인지 다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늘 한 발 빨랐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몇 몇 선수와 코치가 문제가 아니라 지도부 전체가 다 변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고의 폭도 넓혀야 합니다. 상대의 허를 찌를수 있는 머리도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그 날이 꼭 오리라 믿고 또 믿고 싶습니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16 강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 곳 미국 땅에서 38 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미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도움도 받았습니다. 저희 둘의 두 딸도 이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은 저의 제 2 의 조국 입니다. "미국팀, 우승은 기대하지말라"고 잘라 말했던 위르겐 클리스만 대표코치. 조국 독일을 떠나 뉴포트 비치 캘리포니아에서 중국계 부인과 살고 있습니다. 그도 미국을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공격적인 축구 전술, 적절한 타임리 선수 교체 (캐머런 아웃, 곤잘레즈 인..등 등) 개 개인 선수들의 과거 경력과 인기도 보다는 순전히 실력과 팀웍에 의존한 선수 기용, 냉철한 생각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그에게 더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16 강 진출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축구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우리 팀 미국팀, 살아있습니다. 승리 이전에 , 가진 능력 다하여 온 몸을 날리는 모습 보고 싶습니다 .
박성보 (미디어협회)
2014-06-04 편집국에서...
요즘 뜬금없이 피아노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맛에 푹빠져 있다. 취미로 시작했는데 이제 제법 요령이 붙어 웬만한 피아노의 조율은 자신있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피아노의 건반은 88개지만 소리가 울리는 줄은 무려 220개나 된다. 저음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반은 각자 3개의 피아노 줄이 있다는 것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관찰력만 조금 있다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즉 도(C)음을 치면 3개의 현(絃)이 동시에 울리며 아름다운 음을 만들어 낸다. 피아노 조율이란 건반마다 이 3개의 줄이 묶여있는 튜닝 핀을 회전시켜 정확한 음정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조율한 지 오래된 피아노는 대체적으로 이 3개 현의 음이 바르지 않기에, 튜닝핀을 조절하다보면 3개의 현이 한 음으로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나오고 이 때는 약간의 희열도 느낀다. 굳이 피아노뿐 아니라 모든 악기가 정확한 음정을 낼 때만이 악기로서의 기능을 살릴 수 있고, 수많은 악기가 동원되는 오케스트라도 동일하거나 화성이 맞을 때 훌륭한 연주가 될 수 있다. 한 국가가 존재하려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구성요소가 있어야만 한다고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밝혔다. 세상 모든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최소 3가지 이상의 기본요건은 갖춰야 만이 그 존재감을 찾을 수 있듯이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예로 식당비즈니스를 잘 하려면 음식의 맛, 종업원의 서비스, 좋은 위치(로케이션)가 기본이 된다고들 한다. 신문이나 잡지도 비슷하여 충실한 내용(정보),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 광고주의 참여가 승패를 가른다. 새롭게 시작하는 종합교양 월간지 ‘샌프란시스코 저널’을 준비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과연 이 지역 한인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고품격 월간지가 먹힐 수 있을까? 독자들이 원하는 차별화 된 기사와 정보를 정확히 짚을 수 있을까? 광고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따라줄수 있을까? 하지만 지역 한인언론계에 10여 년을 몸담으며 익힌 동물적인 감(感)을 기본삼아, 발로 뛰며 냉철한 판단과 독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을 믿는다. 수개월 만에 3개의 피아노 현을 한음으로 맞춘 것 처럼... 박성보 편집국장 샌프란시스코 저널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4-05-12 어떤 '신세대 엄마'
"너 그렇게 학교 가기 싫으니?" "학교가면 지루해요" "그래서?" "가서 별로 배우는 것도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학교 그만둬" "집에서 홈 스쿨 할테니까 네가 원하는 데로 해 봐" 엄마와 14살 된 아들 사이의 대화를 연상했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뉴욕 브롱스 사이언스 고등학교 다니던 아들 데이비드 칼프. 학교를 그만두게하고 집에서의 홈스쿨로 전학시켰다. 늘 컴퓨터 앞에서 눈을 떼지않는 아들. 어릴적부터 그방면에 심취해온것 잘 아는 엄마였기에 그런 결정을 내릴수가 있었다. 당시 바바라 에이클먼은 뉴욕 사립학교의 과학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보통사람들 생각으로는 교사가 자기 아들을 우수한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홈스쿨로 바꾼다는 것은 받아 들이기가 쉽지않을 것이다. 몇 년 후 2007 년에 아들은 자신의 회사 "Tumblr", 블로거위주의 웹사이트를 차렸다. 시작한지 2 주만에 약 7만 5천명이 조인하면서 급속도로 사용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10 년에는 MIT 대학에서 선정한 MIT Review TR 35, 즉 35 세 미만의 발명가의 한명으로 뽑히게 되었다. Tumblr는 주로 블로거 전문 젊은 세대들 중에서 인기가 대단해 빠른 속도로 급성장, 2013 년 5 월 당시 약 1억 8백만개의 블로거 사용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눈독을 드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야후의 CEO 머릿사 메이어. 2013 년 당시, 싯가 8억의 회사 감정가격 보다 3 억을 더한 11억 달러에 오퍼를 과감히 던졌고 칼프도 그 오퍼를 받아들여 26 살에 억만장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야후의 권유로 텀블러의 책임 운영도 맡게되었다. 텀블러의 영입 결과 야후는 젊은 불로거층에 더욱 더 어필하게 되었다. 어릴 때 아버지와 헤어졌지만 그 녀는 그런 아들을 눈여겨 보면서 늘 그가 원하는 길로 갈수 있도록 도우려고 했다. 거의 모든 부모가 원했던 방향 , 즉 '어떻게 하든지 옆길로 안 빠지고, 우수한 대학교로 가서 좀 더 안전하게 유리하게 사회진출을 하도록 꾀하는 것', 그러기 보다는 그 녀는 자식이 원하고 또 잘할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제 갈 길로 갈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바로 그 점에 그 녀의 깊은 지혜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큰 돈을 벌었다해서 꼭 잘됐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 돈 가지고 무슨 짓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눈을 열어주고 스스로 험난한 길 갈 수있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다수 부모들은 자식의 능력 , 취미와는 상관없이 거의가 다 일류 학교로 진학시키려고 애를 쓴다. 남의 자식과 비교하면서, 누구는 어디갔고, 무슨 잡을 잡았고, 누구와 결혼했고.... 부모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바바라는 아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 능력을 믿고 길을 열어주려고 했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칼프에게 학교공부와 SAT 성적만 밀어붙였다면 그 것은 그의 앞날을 막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학교 공부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 녀는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스포츠, 아트, 게임만들기, 컴퓨터, 만화, 쉐프 음식분야 등 등, -학교성적과는 직접적 관련이 적은- 많은 분야가 있다. 우수한 성적으로 일류 대학 졸업 후 사회 진출하는 소수의 무리가 있지만 구태여 그 들과 똑같이 경쟁해서 그 들의 뒤에서 자리를 채워주는 역활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보다는 자식이 원하는 것, 잘 할수있는 분야가 무엇인지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것 같다. 싱글맘 바바라 에이클먼, 그 녀는 아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행동으로 옮겼었다. 아들의 꿈을 시작하기 이전에 스스로 세상을 보는 눈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과 아들의 길을 갈 수가 있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자신들의 능력을 알고 과감히 발을 내 디딘 것이다. 소위 지혜를 가진 "신세대 엄마"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4-04-02 그녀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었다
소치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정복의 야욕. 푸틴 , 강제로 얻은 올림픽 승리의 여세를 몰아 크림반도로 진군해 갔다. 이미 수순에 다 예정돼 있었던 일. 세 명의 전 현직 미 대통령을 포함, 서방세계의 지도자들 아직도 푸틴의 의도를 꿰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크림반도로 세계의 이목은 전가돼 버렸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소치올림픽 생각들, 정리하고 싶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부터 그 녀에게 바로 못 미치는 지점에 소트니코바를 갖다 부치더니 마지막 날에는 훨씬 능가하는 점수를 과감하게 부여했다. 혹시 각본이 이미 짜여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왕좌를 차지하고자 좌우로 점 점 좁혀 들어오더니 마지막 순간 보이지않는 드로운 공격으로 결정타를 터뜨려버렸다? 최후의 순간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김연아. 패배가 아닌 어쩔수 없는 숙명으로 알고 무대에서 내려선 그 녀. 금메달 보다 더 값진 환한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생각한다. 4 년 전 뱅쿠버 동계 올림픽, 70 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도 원했던 동계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했을 때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체 비용 120 억 달러를 들여 멋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겠다고 선언했었다. 4 년이 지난 지금 전체 비용은 그가 약속했던 액수의 4 배에 달한 500 억 달러가 들었다고 뉴욕타임즈는 보도했었다. 몇 십 억달러를 초과한 것이 아니라 380 억 달러나 더 들었다니, 이해하기가 쉽지않다. 러시아의 고질적인 부정 부패? 푸틴의 어린시절 친구이자 , 절친한 유도대련 파트너*에게 무려 70 억 달러에 상당하는 건축공사 계약이 주어졌다고 한다. 막대한 이권이 재력가들에게 나누어 진 것을 엿볼수 있다. 스탈린 시절부터 독재자의 강압에 익숙해 있던 러시아 국민 들. 전체 인구 1 억 4 천만 중에서, 독재에 굴하지 않는 많은 시민들이 있겠지만 다수가 ' 해결사로 등극한 푸틴'이 러시아의 영화를 다시 이루어주기를 기대했었다. "비용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 승리만 안겨다오(?)"의 원칙이 제일 먼저 적용돠었던 국민 최대의 관심사, 아이스 하키 게임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을 때 러시아 국민 들은 크나큰 좌절감을 맛보았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었다. 그 들의 기대는 점차 분노와 실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겨스케이팅, 마지막 남은 승부. 어떻게 하든지 이겨야만 했었다. 9 명의 저지들, 그 가운데 2 명은 분명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한 명은 러시아 빙상연맹 총재의 부인, 다른 한 명은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사전 부정행위로 처벌을 받은 인물로 다시 심사위원 자리에 복직시켯다. 왜 그 자리에 다시 올라선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세계 여론과 한국.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의 주도적인 아사드 독재정권 지원으로 십 만 이상의 사망자가 났지만 아무도 러시아에게 정면으로 돌던진 국가는 없다. 왜, 보복과 후일, 어디서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데. 한국? 자기들끼리 돌던지며 싸우는데. 큰소리 쳐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전체 방영권을 따 독점중계 중인 미국 NBC 방송. 미국의 상업 방송, 그 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니 마니 마니. 너무도 깊숙히 관여돼있기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잘 알고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연아 하나. 그 녀를 능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채점 방법을 바꾸면 가능할 수도 있다. 예술적 우아함보다는 힘찬 파워에 근거한 세분화된 테크닉에 각기 월등한 점수를 부여하면 승산은 충분하다. 그러기에 이미 수 년 전부터 파워가 넘치는 두 명의 '철소녀'를 키워왔다. 원래 기대를 걸었던 15 살 소녀 리프니츠카야는 초장에는 그렇게 잘 나가더니 쇼트 프로그램에서 꽈당하고 자빠졌으니, 더 이상 재간을 부릴 수가 없다. 단 마지막 남은 한 명, 그 녀만, 제대로 스케이팅을 해준다면 승산은 있다. 연아 만큼 우아하지는 않지만 어리고 신선한 패기로 과감한 스케일로 밀고만 나가 준다면, 물론 쓰러지면 안되겠지만...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우리가 볼 때 그 녀는 연아의 상대는 아직 아니었다. 그러나, 그 녀는 과감했었고 자빠져 나가지도 않았었다.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치 예전 드레스덴 철의 장막에서 늘 했듯이 그는 끈질기게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랜 A가 아니면, 다시 플랜 B로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500 억 달러를 뿌린 푸틴과 그의 추종자 들, 마지막 승리를 얻지 못할 때 무엇이 그 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연아의 희생으로 우리는 그 들 어둠세력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연아, 너무 무거운 짐을 홀로 지게한 것, 참으로 미안하다. 허지만 덕택에 많은 것을 다시 배울 수가 있었다. "푸틴, 그의 눈 속에서 진심을 읽을수 있었다고"말했던 부쉬의 발언이 얼마나 어설픈 것인지 다시 깨달수 있었던 것, 연아 덕택이다! 김연아, 그 녀는 우리의 눈을 다시 환히 열어주었다. 그 열린 눈으로 크림반도를 쳐다보면, 푸틴의 결코 선하지 못한 그 의도가 확실히 더 선명하게 보여질 것이다. 이원창의 열린문 wonyi54@gmail.com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4-02-05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가끔 은행으로 연락하시는 분 들이 계십니다. 지난 해 여름 어떤 분에게서 전화 연락이 왔습니다. 평소에 모르는 분인데, 대출 요청이 왔습니다, 액수가 삼십만 달러. 지금 막 하시려는 비즈니스 옆 커피샾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곧 며칠 내에 리스 계약을 해야된다고 하셨는데 한 달 렌트만 약 2 만 달러를 넘고. 그 곳에 바베큐 하우스를 차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한인들 지역에서 잘(?) 나가는 식당을 모델로 해서 만들겠다는 그런 계획이었죠. 이 지역에 차리는데 설치 비용만해도 5십만 달러를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식당 운영 경험 있습니까" 물었더니 전혀 없다고 해요. 그 식당 사주와 동창인데 일단 차린다면 적극 돕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인의 생각 그대로 계약하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말려야 할지... 몇 몇 은행에서 SBA 론도 알아보셨더군요. 본인 생각으로, 자금은 집을 2차로 저당해서 약 삼 사십만 달러 꺼내고.. 그리고 은행에서 나머지 론 받고...자신이 준비한 돈은 조금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가능하면 투자를 안하시는게 좋겠다고. "미래를 준비하시는 것은 좋지만 안전한 투자가 아닐수도 있다" "경험도 없고, 시장 조사도, 충분한 자본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식당 비즈니스 실제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 직장에서 충분한 수입이 있으신데 만약 식당 비즈니스 시작하면, 현재와 같은 넉넉한 삶을 누리기가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 하겠다면 부부가 같이 전적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두 분이 먼저 충분한 사전 경험을 하는게 좋겠다..." 등 등의 얘기가 오갔습니다. 후에 그 식당 비즈니스는 접어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경우가 많은데 중요한 결정을 이미 스스로 내리신 후에 자금이 필요하셔서 은행에 오시게 되면 문제가 심각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은행원 시절 고객분들이 찾아오시면 '그 분들의 원하는 바를 그 분 입장에서 가능하면 원하시는 데로' 제공해 드리려 애를 썼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렇게 하는게 사실은 고객을 위한 것이 아닌것 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고객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사업하시겠다고해서 그 원하는 데로 해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같이 충분히 사전 검토를 한 후에 그 때 내린 결론에 따라 그 계획을 실행하든지, 취소하든지 , 아니면 변경하도록 권유해야 하지 않을까요? 즉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롱-텀 흑자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되겠지요. 반면에 충분한 경험과 능력을 가진 분들이라면 투자의 방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지난 7 년 간의 경기침체 동안에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무리하면 안된다는 사실; 주로 " 최소한의 다운 페이 최대한의 대출"을 받아 집을, 비즈니스를, 혹은 빌딩을 구입하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후회하십니다. 그 때 그 론이, 그 모기지가 안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었지요. 올 해는 경기가 돌아올 것이라고 경기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3 퍼센트* 이상으로 경기가 성장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긴 겨울 동면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펴시고자 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혼자의 생각으로 결정하지 마시고,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숙고하신 후에 제 삼자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상의하십시요. 미국을 리드하는 대기업들도 투자 이전에 철저한 사전 계획 검토를 거칩니다. 그러니 소 기업들 , 서민 투자가 들은 더 적극적으로 어드바이스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 ?, 쓰러져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뒷 돈도 없지않습니까?... 대 기업, 은행 들은, 'Too Big To Fail' 덕을 봤고, 또 볼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한 번 더, 아니 두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십시오 , 부탁입니다". *Fed Reserve 2014 년 예상 : 2.8-3.2% 경기 성장 BlackRock 미 최대 에셋 매니지먼트 : 3% 이상 성장 Scott Anderson, Chief Economist Bank of the West: 3.0 % 성장 이원창 뱅크 오브 더 웨스트 , 미드 윌셔 코리아 타운 Wonyi54@gmail.com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4-02-04 '산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할까?
'산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할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저 지난번 교회 대출건 상의 드리려 왔습니다" "아, 그 대출건, 그 론은 이미 하지말자고 내가 얘기했잖아요?" "행장님, 제 생각으론 그 론을 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형, 내가 말했지만, 교회론은 더 신중하게 처리해야지. 가끔 신문에서 보듯이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론 상환이 어렵게 되잖아요?" "이 론은 그 성격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냥 신용 대출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커뮤니티에 재투자하는 의미도 있구요. 거기다가 목사님 개인 주택을 2차 담보로 (에퀴티도 충분하고) 제공하겠다는데요?" "그래도 곤란해. 담보가 있다고 해도 교회론은 좀 더 신중하게 다뤄야지" 두 번이나 행장님에게 제출했지만 반응이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방법은 더 이상 없는 것인가?... 지점으로 돌아온 나는 목사님 사모님에게 대출이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이에 사모님은 "은행일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못해줘야될 이유가 없잖아요? 반문해 오셨다. " 한 가지 제안을 드린다면, 사모님께서 사범대학을 나오셨다고 하시든데 행장님에게 직접 그 대출에 관한 서한을 보내셔서 상환 능력, 충분한 담보 제공, 자금의 용도를 조목 조목 명확하게 밝혀주시면 어떨까요 ? 그저 저한테 말씀해주신 그대로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혹시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대출 신청인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목사님과 사모님 두 분이 교회를 위해 자신들이 사는 집을 담보로 내놓을 만큼 전력투구한다는 점을 은행측에서 충분히 고려했으면 합니다." 며칠 후, 행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네 이원창입니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장님은 질문을 던진다. "이 형, 오늘 내가 그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이 형, 그거 혹시 이 형이 시킨것 아니요?"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이 형 , 당신이 시켰잖아, 내가 다 알아, 안다구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알았어. 그 론 다시 올려봐요, 다시 한번 보자구....고객을 위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는 안돼." 행장님,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속은 따뜻한 분이다. 행장님은 본인의 생각과 달라도 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행장실에 갈 때마다 충분한 검토를 준비하고 갔지만 역 부족이었다. 그의 질문은 상세했고 현실적이었다. 그냥 쉽게 넘 길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도 많이 배웠다. 일 년 내내 대출 건을 두고 서로 간의 이견으로 난항을 거듭했지만, 그로 인한 개인적인 불이익은 없었다, 전혀. 오히려 나를 승진시켜 주셨다. 90 년 초 한인 은행 최초로 샌 퍼난도 벨리 지역에 오픈한 지점에 두 번째 지점장으로 나가게된 것도 주로 그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벨리 지역 한인 상권은 아직 소규모 수준이어서, 나에게 맡겨진 주 임무는 그 지역 백인및 다인종의 중산층 마켙을 뚫고 들어가는 일이었다. 결국 그 론은 승인을 받았다. 목사님도 그러셨지만, 사모님이 앞장서서 자신 들의 집을 교회 일을 위해서 내놓겠다고 하니, 믿음을 스스로 행하신 것이다. 마지막 날 서류 사인을 위해 지점으로 오신 날, 허름한 잠바를 입으신 재정담당 장로님의 따뜻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모님의 역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꼭 한 사람 더; 바로 행장님의 지원이 없었다면....어땠을까? 그 후, 행장님은 은행을 떠나셨고 나도 그 은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미 24 년이나 흘러갔지만 그와의 인연은 더 깊어져 갔다. 멀리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지만, 거리가 멀수록 우리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은행에 있을 때 와는 전혀 다른 인과 관계; 상하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전환되었지만 그에 대한 나의 자발적 존경심은 예전보다 더 폭이 깊고 넓어졌다. 나와는 달리, 보는 각도가 깊고 더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을 그는 소유했다. 그래도 그의 집요한 추궁(?)과 지적은 계속되어 갔다. 사실 그래서도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나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쌓은 사고의 박스에서 벗어나 전체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도달했어도 아직 스스로의 결정을 못 내릴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연락하면, 내가 보지 못했던 이면을 나에게 보여주시곤 했다. 이제 LA로 다시 가게된 것도 그와 충분히 상의한 후에 내린 결정이다. 삼 십년 가까운 은행 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배워야 할 일이 많다. 나 자신의 주장,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늘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서 뭔가를 배운다. "내 클래스에서 A 학점은 없다. 단,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논리를 제공하는 학생에게는 A를 주겠다"고 말한 윌리엄스 칼리지 교수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많이 알고있다 해도 항상 모르는 것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알고있던 것이 틀릴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도 마음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곡해하는 사람 들, 그 들에게도 내 마음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 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그를 통해 내가 더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를 때문이다. 비록, 내 맘에 안들고 또 의견이 다르다 하더라도. 정말 어렵지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할텐데... 그러기엔 내 마음이 좁다. 너무 좁다! 원하지 않았지만, 부하직원의 뜻을 알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안 행장님, 그 삶의 폭이 크다. '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으로 부터- '새로이 배운다'는 것이다.
한국시사 (전문가 그룹)
2014-01-22 캄보디아의 북한박물관에는 가지 말자
북한이 세계적 관광명소인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에 1500만 달러(약 160억 원)를 투자해 박물관을 짓는다는 소식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북한은 앙코르와트 유적군이 있는 캄보디아 관광도시 시엠립 시내에 ‘그랜드파노라마 박물관’을 건립해 공식 개관을 앞두고 있다. 북한의 해외 투자 항목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프로젝트다. 현재 5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로, 자기들이 돈을 투자해 다른 나라에 무엇을 만든 것은 전례가 없다. 한 푼이 아쉬운 북한이 이런 큰 자금을 투자하기로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북한이 앙코르와트 유적에 투자한 배경은 크게 3가지 요인으로 풀어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캄보디아와 북한과의 오랜 유대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김일성의 오랜 친구로 정치적 위기 때 평양에 장기체류했던 노르돔 시아누크 국왕과의 관계로 형제국가 이상의 관계를 형성해 왔다. 두 번째는 캄보디아가 갖는 동남아지역에서의 역할 때문이다. 라오스나 베트남 등 전통적으로 북한과 동맹국이였던 국가들이 모두 대한민국과의 친선 관계로 돌아섰다. 북한편이었던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기운 많은 국가들이 다시 북한과 협력을 강화하려면 거점이 필요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한국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금 수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김일성 부자(父子) 기념물들을 통해 한국사람들을 포함, 전 세계 관광객들을 상대로 김씨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최적의 위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지리적 이용가치를 고려하면 아무리 현금이 없는 북한이지만 거금을 들여 투자할 만한 메리트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이 건설한 ‘그랜드파노라마 박물관’에는 8~15세기 꽃핀 크메르 제국 시대의 일상생활과 문화를 보여주는 대형벽화 등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백두산 풍경과 김정일 생가의 그림까지 전시돼 있다고 한다. 돈벌이와 체제선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다. 박물관 사업을 담당한 곳은 북한에서 김정은을 선전하는데 동원되는 ‘만수대창작사’가 맡고 있다. 만수대창작사는 노동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소속으로 김정은 선전 외에 기타 예술작품으로 버는 돈은 모두 노동당에 흡수된다. 북한이 건설해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운영하게 될 박물관의 모든 수입도 노동당 수입이라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북한의 모든 대외사업은 인민경제와 무관한 체제유지를 위한 자금 확보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체제유지 비용은 정치적으로 수령우상화와 독재자의 호화생활, 체제유지를 위한 핵과 미사일 개발 등이 포함된다. 과거 금강산 관광 사업이나 현재 진행 중인 개성공단 근로자들이 창출하는 현금 수입도 모두 군부 운영자금으로 쓰이고 있다. 가중되는 외화난으로 수십만의 근로자들을 해외에 파견해 막대한 돈을 벌고 있지만 북한당국은 근로자의 월급까지 갈취하며 핵과 미사일 등 체제유지비용으로 충당하고 있다. 앞으로 앙코르와트 유적지에 건설된 북한 박물관에 한국 국민은 물론 많은 해외동포들이 무심코 방문할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이 어떤식으로 박물관을 유지할지 궁금증이 생긴다. 하지만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우리 관광객들이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북한이 건설한 박물관에 갈때에는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해외에 있는 북한식당을 이용하는 관광객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이 내는 돈은 작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 막대한 돈이 북한정권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 돈은 인민의 민생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우리를 위협하는 핵과 미사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수령우상숭배를 중단시키고 북한이 정상국가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선전과 돈벌이 수단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북한정권에 인식시켜야 한다. 강철환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대표)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4-01-10 노후에 자유를 누리다
미국에서는 지금 노인들의 부채 문제가 심각한 사회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고 합니다. 부채가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메디컬 병원비. 나이가 들면서 점 점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보험도 없이 병원에 갔다가 나중에 집으로 날아오는 빌을 보면 서민에게는 엄청난 액수가 적혀있습니다. 잠깐 들렀는데 수 천 불에서 만 불을 상회합니다. 그게 쌓이다 보면 갚을 엄두가 안나지요. 오바마케어가 시작되었으니까 상황이 달라질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 제일 쉬운 선택이 뱅크럽시라고 합니다. 즉 뱅크럽시를 부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메디컬 빌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자녀들을 위해 빌린 돈입니다. 본인도 어려운데 그래도 자식을 위한다고 대학 학자금을 빌린다거나 채무 서류에 보증을 서는일, 결혼비용으로 수만 달러에서 십만 달러 이상이나 돕는 것이지요. 넉넉해서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심지어 누구네가 집을 2차로 담보잡아서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식들을 도와준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요. 차라리,능력이 없으면 "우리가 돕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게 낫지, 괜히 빚져가지고 후에 자식들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자립심을 키워주면 나중에,나이가 들어서도 제 갈길을 확실히 갈 수있게 되죠. 그 뿐만 아니라, 노년이 되어서도 큰 부채없이 형편이 넉넉해서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는다면, 그 것도 자식들에게는 큰 복이 될수도 있지요. 그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 필요가 없으니까. 한가지 아쉬운 점은 , 그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식들 최고학부까지 공부시켰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공부만 열심히 시킨 자식들 , 하바드 예일 프린스턴 보냈다고 자랑하시더니 그 자식들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끔 연락은 옵니까?... 물론 댓가를 바라고 공부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가 기울인 노력의 십분지 일만큼이라도 마음을 써준다면....더 바랄게 없겠지요.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얼마안되는 (?) 재산 잘 관리해서 노후에 아내에게나 아이들 , 그 누구에게도 짐이 안되도록 해야 되겠지요. 부채와 병으로 부터의 해방. 참 자유를 누릴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이원창 Bank of the West Mid-Wilshire, LA 열린문 : Wonyi54@gmail.com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3-11-11 세상을 바꾼 인물
약 19 년 전 어느 날, 젊은 그 들 허름한 그라지 방에 모였다. 오래된 선 마이크로 시스템 컴퓨터 몇 대와 전화기들, 그 것이 당시 가진 사업 장비 전부였다. 그렇게해서 모인 다섯명, 씨애틀, 퍼시픽 노스웨스트에서 새로운 상거래의 변화를 일으키고자 했다. 다음 해 영업에 들어가자 매상은 예상보다 빨리 오르기 시작해서 연말에 이르러서는 총 51만 달러, 한 때 위기에도 몰렸었지만 18 년이 지난 2011 년에는 179억 달러의 매상을 올리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회사의 기업가치는 1,250억 달러에 직원 수는 9 만 7 천명. (21013 년 6 월 기준). 고객수만 해도 미 국내 프라임 어카운트 4 백 만, 월드 와이드 1억 2천만. 미 메이져 리테일 비즈니스 중, 최고 급성장한 기업이 되었다. 사주의 개인 재산도 약 252억, 탑 서열로 올라섰다. 이 모든 것이 채 20년이 안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니... 새 비즈니스에 같이 뛰어든 초창기 멤버들, 뒤따라 온 사람 들, 구글, 야후 처럼 공짜 런치도 많은 베네핕도 없었지만, 철처히 파고들면서 '이제까지는 없었던' 시장을 만들어 왔다. 오더받고 물건 보낼 때, 손해봐도 딜리버리 차지는 대게 감수했다. 제품에 대해 항의하면 즉시 리펀드 해주었다, 때로는 물건 다시 반환안해도 된다고 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마음에 안들면 다시 리턴하라고 했고, 원한다면 쉽게 리턴할 수 있도록 편리를 제공했다. 연방 대법원에서 판결나기 전까지는 세일즈 택스도 안받았다. 철저한 고객 관리, 가격 다운, 그리고 에프터 서비스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 얻은것이 두터운 소비자의 신뢰! 그 결과, 소비자들, 똑같은 물품을 가까운 스토어에서 아이샤핑한 후 실제 오더는 그 들에게 했다. 한 번 문이 열리자 몰려드는 고객들. 방대한 숫자의 소비자 신상, 선호도, 취미 정보들이 확보돠었다. 그래서 미 CIA도 큰 고객이 되었고 ,작년에 컴퓨팅 서비스로 이 회사 방계회사 (AWS)에 6 억 달러의 계약을 의뢰했다. 그 뿐 아니라 지난 2009 년에는 연 매상 10 억 달러의 세일즈로 최대의 온라인 슈스회사로 올라선 "자포스"를 12 억에 사들였었다. 같은 그룹으로 들어왔어도 경영은 자포스 창업자들에게 계속 맡겼다. 왜 그랬을까?......"They do it better", 그런 확신을 가졌기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자만애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갓 4 살 때 , 어머니가 어린나이에 결혼했던 그의 생부와 결별, 쿠바출신 엔지니어와 재혼해서 그의 호적에 올려졌다. 어린시절 이것 저 것 만지고 놀기좋아하더니 고교졸업 때는 학생 대표로 뽑혔고 ,프린스턴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 뉴욕 투자 은행에서 일하다가 뱅커스 트러스트로 옮겼고 다시 잘나가는 인베스트먼트 뱅크의 부사장으로 갔으나 모든 것 다 접고 와싱턴 주로 향하게돤다. 대륙 끝으로 가는 장정, 차안에서 평소 구상한 비즈니스 모델을 완성, 도착 즉시 동료들을 대동 그라지 방으로 직행 , 사업 준비를 한 것이다. 부인 맥킨지와의 사이에 네 자녀를 둔, 지극히 노출을 꺼리는 인물. 그러던 그가 택한 과감한 기업 인수로 그의 얼굴은 각 언론 매스컴 표지를 채우게 되어 확실히 잊을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 와싱턴 포스트지, 135 년 전통의 정상의 언론 그룹을 단 돈 2억 5천만 달러에 사들였다. 자기 돈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신문 , 47 번이나 퓰리처 상을 수상받은 와싱턴 정가의 유력지 (총 구독자 474,767. 2013 년 6월 기준). 사주 그레이험과 그 페밀리는 아픔과 번민으로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갑작스런 최대 유력지의 헐값 양도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하지만 사실 상 그렇게 놀랄일은 아니다. 워런 버핏을 포함한 메이져 주식 투자가들, 그 들의 관심이 점차 멀어져가는 것을 보면서 한 때 십 억을 호가했었던 기업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비즈니스 플랜에 들어와 있는 타겟,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저가로 떨어졌을 때 오퍼를 던진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올 것이다. 바짝 긴장한 업계. 월마트부터, 애플, 그리고 각 언론 그룹들, 모두가 주시하고 있다. 아마존 닷컴, 전자 상거래의 선구자 리더. 디지털 북 리더 킨들로 이미 세상을 한 번 더 바꾼적(?) 있다. 다시 또 무엇을 바꿀 것인가? 세상을 바꾼 인물, 그 것도 두 번 씩이나. 제프 베이죠스. 49 살. 오직 미래를 본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내 눈을 들어 세상을 보라"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3-09-17 제 2 의 찬스
미국에서 경쟁률이 가장 심한 곳은 어디일까? 대입시, 대기업 취직, 교수 잡 얻기?, 평균 10:1, 혹은 20:1..... 이 와는 전혀 상대가 안될 정도로 어려운 곳이 또 있다. 어디일까 , 도대체 그게 뭔데 그렇게 어렵다고 하나? 바로 미 대법원의 심의 케이스로 채택되는 것이다. 매 년 7 천건 이상이 최종판결을 바라고 대법원으로 가지만 실제로 심사의제로 꼽히는 경우는 약 100 케이스 미만. 즉, 평균 70:1의 경쟁률. 그만큼 치열한 것이다. 대법관 4 명의 동의를 구하면 채택되지만 , 반대로 기각되면 그걸로 끝, 항의할 수도 없다. 최근 뉴욕타임즈에서 보도한, 대법원에서 실제로 다룬 케이스를 소개한다: 경찰이 마약사건 조사중에 피의자의 (헌법상의) 기본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고 수사를 강행, 그 결과로 유죄판결을 받은 재소자와 관련된 억울한 (?) 케이스 하나. 더군다나 미 대법원에 재심 청구를 올린 장본인은 변호사도 아닌 당시 같은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죄수. 그렇게해서 간신히 올라간 케이스가 미 대법원에서 그 것도 9 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심의하기로 받아들여졌다면... 정말 드문 일로 생각할 수 있다. 문제의 장본인은 바로 샨 호프우드 (38 세). 내 년이면 유니버시티 오브 와싱턴 법대를 졸업한다. 15 년전 , 23 살 때 그는 권총 강도로 은행에 침입, 20 만 달러를 강탈 도주하다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47 개월의 중형을 받게된다. 복역 도중, 옆 방의 죄수로 부터 딱한 하소연을 들은 그는 법에 대해 문외한 이었지만 마침 형무소 내에 있는 법룰도서관에서 오랜 시간동안 관련자료를 리서치한 후 페티션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청원서를 심사한 당시 미 법무차관 세스 왝스만씨는 '이제까지 자기가 본 청원서중에 가장 잘 준비된 페티션'이라 하면서 기꺼이 그 케이스를 직접 맡아 대법원에 제출, 대법관 9 명 전원의 합의로 최종 승소하게 되었다. 이 케이스의 전모가 밝혀지자 세간에서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인터뷰 요청도 많았지만, 그의 능력을 보고 법대 진학을 돕겠다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다름아닌 "게이츠 재단". 학비전액 장학금을 약속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반전된 그의 삶은 불우이웃들에게 귀감이 될 사선이였다. 씨애틀 지역 최 우수 법대로 진학한 그는 재학중에 로우 펌 보다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는 연방 판사의 인턴 서기로 일하는 기회도 가졌었다. 또, 그가 내 년에 졸업하게되면 미 연방 대법원 다음 서열인, DC 지역 연방항소법원 판사의 로우 클럭으로 가기로 결정되어있다고 뉴욕타임즈는 보도한바 있다. "내가 저지른 범행으로 12 년의 중형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5 년 이상의 형을 받게되면 대개는 좌절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인은 밝히고 있다. 담당 판사 왈 " 권총강도범 들에게는 중형이 마땅하다"고 하면서 호프우드씨가 "그러한 과거를 벗어나 이렇게 재기할 줄은 몰랐다"면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부에서는 당시 " 그의 권총강도 짓으로 인해 지울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은 어디가서 보상을 받을 것인가?" 하면서 불편한 심기도 드러내었다. 나아가서 "바 시험, 즉 변호사 시험을 패스해도 마지막 관문, 변호사 자질 심사를 통과할수 있을지 의심된다"고 조심스럽게 말 문을 꺼냈다. 많은 사람들, 즉 세컨드 찬스를 믿는 사람들 , 진정한 회생을 원하는 사람 들, 특히 그를 채용하기로 작정한 연방 판사는 "그의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과거의 잘못을 충분히 뉘우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사회에 이바지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제 2 의 찬스'를 허용해야 한다면서" 마음문을 열 것을 강조했다. 권총 들고 은행 강도짓 했으면 , 대개는 인생의 끝이다. 더 이상 기회는 없다. 그러나 그런 중범죄를 저지런 자에게도 제 2의 찬스가 주어졌다. 본인의 부단한, 말할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이 따랐을 것이다. 만약에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더 낭떠러지로 떨어졌을런지도 모른다. 주변을 돌아보면, 재 2 의 찬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혹은 주어야 될 사람들이 많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고 하자, 혹은 그 고통을 주었다고 하자. 그래도 권총강도 짓 만큼이나 했을까?...... 물론 아무리 적은 일이었다 하더라도 안 당해보면 몰라, 당신은 가만히 있어, 입열지 말고.....그렇게 말 할 사람도 많겠지. 그래도 한 번쯤, 아니 두 세번 이라도 용서의 기회를 주어야하지 않을까? 같이 섬긴 사람들, 한 밥 같이 나눈 사람들. 서로에게 두 번째의 기회는 영 영 없는 걸까?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3-08-22 고마운 사람들
"저 신문 광고 보고 왔습니다. 은행 경험 있어요? 아니, 없습니다. 없으면, 곤란해요." "다시 찾아왔습니다. 지난 번에 말했지만 안된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은행일은 그렇지가 않아요. 경험도 없고 비즈니스 전공도 아니고. 경험은 없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분명히 말하지만 이 번에는 어렵겠어요." 두 번이나 은행으로 찾아갔지만 , 다 거절당했다.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고 있는데 동창회가 열렸다. "어, 나 누군데 외환은행에서 일하고 있지" "아니, 선배님, 거기서 일하시는군요. 마침 잘되었습니다." "뭐가 잘되었는데?" "제가 사실 거기 지원했는데, 두번이나 거절 당했습니다. 선배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내가 한 번 알아보지. 기다려봐." 그 이후 그 선배님으로 부터 대답은 오지않았다. 당장 중학교 보조교사 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딫혀보자. 그렇게 다짐한 후 저녁 늦게 은행문이 닫힐즈음 다시 찾아갔다. 문 옆에 서니 지점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들어오라고 손짓하셨다. "내가 안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제가 경험도 없고 비즈니스 전공도 아니지만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제대로 못하면 그 때 저를 화이어 시키세요. 절대 후회 안하겠습니다." "그래요....흠...... 월요일 날 출근해요" 그렇게해서 시작된 나의 은행원 생활. 1980 년 3월 초. 샌프란시스코 금융가 가주 외환은행. 부쉬 스트맅 234 번지. 몇 달 지났지만 다행이도 짤리지는 않았다. 일 년 후 국제업무를 맡기셨다. 나에게 어려운 기회를 허락해준 황영삼 지점장님. "한인 은행에서 일하게되면 우선 타이틀이 있어야 고객들이 우습게 보지않을거구. 실제로 정식 직책은 아직 아니지만 우선 수퍼봐이져 타이틀로 명함을 오더해줄테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요." 막상 일을 시작하니,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변했다. 그의 마음 쓰는 것을 보니, 내가 살아남을수 있도록 최대의 도움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우리가 뭐 좀 물어봐도 되요?" 고참 여직원이 나에게 물어왔다. "네, 괜찮습니다. 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뭐든지." "실례지만 봉급 얼마 받아요?" "저,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한데요." "뭐 그런 것 숨길 필요가 있어요. 말 해봐요" "저 .........천 불입니다" "뭐, 천 불? 아니 경험도 전혀없는 사람이 우리보다 더 받아?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핸리에타, 유태계 은행원과 워런 ,B of A 출신 중국계 3 세. 여자 선배님들과 동료 여직원들로부터 신뢰를 받기는 꽤 오래걸렸다. 다 마음이 넉넉했다. 참 성실한 분들 이셨지. 그 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 참 그 선배님, 지점장님과 사이가 그렇게 나쁜 줄 몰랐었다. 하마터면 그 잡도 못잡을 뻔 했지. 그 길로 들어선지도 이제 32 년. 길다면 긴 세월. 여러 은행을 거쳐 약 4 년전에 옮겨온 영국계 은행. 되돌아보면 , 준 것 보다는 받은 것이 훨씬 더 많았다. 동료 직원들과 고객들.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멘토가 되주신 이 선생님. 많은 실수를 했음에도 다 너그러이 받아주셨다. 그 들과 만나게된것 , 내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수 없다. 고마운 사람들. 그 들에게 진정 감사할 뿐이다.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3-08-22 고마운 사람들
"저 신문 광고 보고 왔습니다. 은행 경험 있어요? 아니, 없습니다. 없으면, 곤란해요." "다시 찾아왔습니다. 지난 번에 말했지만 안된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은행일은 그렇지가 않아요. 경험도 없고 비즈니스 전공도 아니고. 경험은 없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분명히 말하지만 이 번에는 어렵겠어요." 두 번이나 은행으로 찾아갔지만 , 다 거절당했다.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고 있는데 동창회가 열렸다. "어, 나 누군데 외환은행에서 일하고 있지" "아니, 선배님, 거기서 일하시는군요. 마침 잘되었습니다." "뭐가 잘되었는데?" "제가 사실 거기 지원했는데, 두번이나 거절 당했습니다. 선배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내가 한 번 알아보지. 기다려봐." 그 이후 그 선배님으로 부터 대답은 오지않았다. 당장 중학교 보조교사 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딫혀보자. 그렇게 다짐한 후 저녁 늦게 은행문이 닫힐즈음 다시 찾아갔다. 문 옆에 서니 지점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들어오라고 손짓하셨다. "내가 안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제가 경험도 없고 비즈니스 전공도 아니지만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만약 제대로 못하면 그 때 저를 화이어 시키세요. 절대 후회 안하겠습니다." "그래요....흠...... 월요일 날 출근해요" 그렇게해서 시작된 나의 은행원 생활. 1980 년 3월 초. 샌프란시스코 금융가 가주 외환은행. 부쉬 스트맅 234 번지. 몇 달 지났지만 다행이도 짤리지는 않았다. 일 년 후 국제업무를 맡기셨다. 나에게 어려운 기회를 허락해준 황영삼 지점장님. "한인 은행에서 일하게되면 우선 타이틀이 있어야 고객들이 우습게 보지않을거구. 실제로 정식 직책은 아직 아니지만 우선 수퍼봐이져 타이틀로 명함을 오더해줄테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요." 막상 일을 시작하니,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변했다. 그의 마음 쓰는 것을 보니, 내가 살아남을수 있도록 최대의 도움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우리가 뭐 좀 물어봐도 되요?" 고참 여직원이 나에게 물어왔다. "네, 괜찮습니다. 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뭐든지." "실례지만 봉급 얼마 받아요?" "저,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한데요." "뭐 그런 것 숨길 필요가 있어요. 말 해봐요" "저 .........천 불입니다" "뭐, 천 불? 아니 경험도 전혀없는 사람이 우리보다 더 받아?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핸리에타, 유태계 은행원과 워런 ,B of A 출신 중국계 3 세. 여자 선배님들과 동료 여직원들로부터 신뢰를 받기는 꽤 오래걸렸다. 다 마음이 넉넉했다. 참 성실한 분들 이셨지. 그 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 참 그 선배님, 지점장님과 사이가 그렇게 나쁜 줄 몰랐었다. 하마터면 그 잡도 못잡을 뻔 했지. 그 길로 들어선지도 이제 32 년. 길다면 긴 세월. 여러 은행을 거쳐 약 4 년전에 옮겨온 영국계 은행. 되돌아보면 , 준 것 보다는 받은 것이 훨씬 더 많았다. 동료 직원들과 고객들.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멘토가 되주신 이 선생님. 많은 실수를 했음에도 다 너그러이 받아주셨다. 그 들과 만나게된것 , 내 인생의 큰 축복이 아닐수 없다. 고마운 사람들. 그 들에게 진정 감사할 뿐이다.
이원창 (비즈니스, 빌딩 융자 전문)
2013-08-08 그 아버지에 그 딸
따르릉,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빠! 하바드 됐어요!! "신나는 음성이다. "그래 잘 됐구나" "아니, 아빠 나 하바드 가는거 원하지 않아요?" "좋지 , 하바드. 당연히 좋지" "근데, 아빠, 음성이 뭐 그래. 그냥 별로 인것 같아" "그게 아니고... 아빠 생각에는 버클리도 좋은것 같아서" "아니 왜, 버클리가 더 좋아요?" "더 좋다기 보다는 아빠 생각에는 , 하바드에 비해서 버클리도 수준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멀리 떠나는 것 보다는 가까운 학교 다니면서 가끔 집에도 오고" "그래도 하바드 갈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빠는 내 마음을 너무 몰라.." "아빠가 왜 모르겠어 우리 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단지, 아빠 생각에는 꼭 하바드로 갈 필요는 없다 이거지. 버클리 나와도 네가 하고싶은데로 다 할수있다 그 거지." "아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하바드 왜 가지?" "그 건 그 사람들 생각이고. 그대로 따라갈 필요가 없잖아" "하여튼 우리 아빠는 달라. 다르단 말이야......." 제 주변에 있는 남 선생님과 그 딸 이야기 입니다. 좀은 허름한 집에 살면서 동네 공립학교에 딸을 보냈지요. 그래도 딸이 옆으로 나가지 않고 학교를 잘 다녔습니다. 그 학교 마치고 버클리 입학 때 딸이 학자금 신청을 위해 부모의 세금보고서를 보게되었습니다. 보는 순간 딸의 눈이 휘둥그래 지면서, 아빠에게 물었지요. "아니 아빠 언제 이렇게 많이 벌었지? 그러면 왜 우리 이동네 살지?" 아빠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딸은 아빠가 많은 돈을 교회에 내는 걸 알게되었지요. 자신은 토요다 코롤라 그 것도 오래된 것 끌고다니면서. 지금도 그 차가 자기한테는 최고라고 하면서 자랑하지요. 좌우지간 고장이 안난다니까...하 하 하. 집은 그 후 아는 분 소개로 공항 근처로 옮겼습니다. "가능하면 코-싸인 하지마세요. 그 분들이 벌리는 일인데 왜 퍼스널 개런티를 하세요" 그렇게 수 차례 권해도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혹 누가 어려우면 도우려고 애쓰시지요. 얼마 전에도 어느 유학생 학자금 융자에 개런티 싸인을 하셨더라구요. 몇 만달러 되는 데 만약 못 갚으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어도 "학생이 어렵지만 공부하겠다고 하는데 그 건 꼭 도와야지요" 늘 말려도 그의 생각을 바꿀수는 없네요. 딸은 하바드로 가지 않고 , 버클리로 가서 도시계획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학교 다닐때도 보면 봉사센터에서 이웃들 열심히 돕더군요. 그렇게 해서 졸업했는데, 마침 불어닥친 최악의 경기 침체. 타이밍이 나빴지요. 다 들 어려우니, 잡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 마침 UC 리버사이드에서 두 명의 연구원을 뽑고있었죠. 전체 지원자만 약 오 백 여명. 일차, 우수연구원 후보 10명에 걸렸고 최종 심사에서 어렵게 뽑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실력과 그 누군가의 도움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것 같았습니다. 연구원의 임무중 한가지는 그 연구 프로젝트 과정을 발표하게 돠는 것. 그래서 한 번은 UC 얼바인에 가서 발표를 했는데, 끝나자마자 그 학교에서 이 번 학기부터 교수로 임명, 와서 근무해 줄 것을 요청 받았다고 하지요. 이 번에도 늘 그러하듯이 아빠에게 의견을 물어왔습니다. 아빠 왈 "리버사이드에서 좋은 기회를 주었으니까 올 해까지의 연구는 그 곳에서 마치고 내 년부터 얼바인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다". 역시 딸은 아빠의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확실히 둘이 닮은 것 같습니다. "그 딸에 그 아버지!"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아버지에 그 딸" 참 감사한 일입니다. "저와는 무슨 관계냐고요?" "관계는 무슨... 그 저 제가 한 이십년 옆에서 그를 저의 맨토로 활용(?)해온 것, 그 것 밖에 없습니다." 이원창 열린문 wonyi5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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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2 신격화된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
평양에 교회가 생긴 것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던 1989년 여름이었다. 종교는 인민의 혁명사상을 좀먹는 마약이라고 선전하던 노동당에서 축전에 참가했던 2만 2천여 외국인에게 북한에도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필자는 평양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기독교, 하나님, 성경, 목사님, 설교 등의 교회용어는 듣도 보도 못했다. 먼발치에서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보며 ‘아하! 외국인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세미나를 하는 장소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지난 1997년 3월 말, 쿠웨이트 주재 북한건설회사 생활을 접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 상공에 들어선 후 지상을 내려다보니 뾰족한 십자가가 마치 병원을 상징하는 적십자 마크처럼 보였다. 순간 평양에서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비롯해 온갖 범죄와 세계 최고의 교통사고가 빚어지는 서울의 어두운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하여 ‘아하! 남조선은 사고와 범죄의 천국이니 환자를 위한 병원이 저렇게 많겠다. 나는 죽으나 사나 자동차 곁에는 얼씬도 말아야지.’하고 결심했다. 그 결심은 1년도 못가서 거짓말이 되어버렸고 지금까지 무사고로 조심조심 운전하며 살아가는 이곳 서울은 분명히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북한에서는 ‘태양절’이라 불리는 김일성 생일축제에 온 나라와 2천만 주민이 부글부글 끓는다. 남한에 있는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을 합친 것 이상으로 축제 분위기이니 거대 종교명절을 방불케 한다. 남한에 교회가 있듯이 북한에는 각 기관과 단체, 군부대와 농촌 등 모든 단위에 김일성혁명역사연구실(개인숭배 자료 및 학습실)이 있다. 크고 작은 김일성 동상이 1만 여개나 있고 각 가정에 김일성 사진과 어록이 있다. ‘수요학습’과 ‘금요강연’이 있으며, 한 주간 자신의 정신을 혁명의 수령인 김일성의 사상에 맞추어 총화 받는 ‘주생활총화’는 천주교의 고해성사와 유사하다. 김일성 전집이 시리즈로 40여권 있고 김일성 찬가는 무려 6만여 곡이나 있다. 노동당 충성자금 헌납이 있으며 전체 주민이 의무적으로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한다. 이쯤 되면 북한은 ‘김일성 종교국가’이며 2천만 주민은 ‘김일성 교인’이다. 그것도 엄마 뱃속에서 김일성 학습을 하고 세상에 나오니 모태신앙인이다. ‘노동당 유일사상확립 10대원칙’에 맞춰 성부, 성자, 성령과도 같은 김일성 하나님, 김정일 예수님, 김정은 성령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김일성과 하나님을 생각하며 ‘북한에서는 김일성 아버지가, 남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으니 우리 민족에 무슨 아버지 복이 이렇게 많을까?’ 했던 필자다. ‘김일성이 어떻게 신격화되었을까?’하는 고민은 남한에서 그가 종교가문에서 태어났음을 알고 풀렸다. 하나님 자리에 자기를 놓고 모든 주민을 기독교와 유사한 공산주의체제로 다스렸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이 하나님 대신 김일성을 숭배하였기에 그에 대한 신의 저주로 그토록 가난한 국가로 전락되었는지 모른다. 자신들이 ‘민족의 태양’이고 ‘어버이’라며 자손대대 철권통치하는 김씨 왕조의 현대판 가롯 유다와 같은 사기행각은 오늘도 계속된다. 인간으로써 당연히 가져야 할 자신들의 소중한 권리를 노동당에 무참히 짓밟힌 채로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부르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2천만 북한 주민의 충성 맹세는 언제야 끝날까? 한민족의 치욕인 6·25전쟁으로 이산과 분단을 만들고 주민의 피땀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모자라 산 사람이 부러울 정도의 호화궁전에 드러누운 김일성이 태양인가? 어불성설이다. 그는 북한 주민들을 너무 가까이 가면 뜨거운 열에 타 죽고 멀리하면 추워서 얼어 죽는 일개 벌레처럼 취급하는 가짜 태양이다. 림일 탈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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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3 김정은이 죽는 길과 사는 길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만행을 일으켰던 김정일이 그 이듬해에 죽고 그의 아들 김정은이 등장했다. 28세의 젊은 나이라는 불안감은 있었으나 서방국가 유학 경험 등으로 북한 변화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김정은은 2012년 4월 13일 인공위성으로 위장한 미사일 광명성 3호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12일 은하 3호 발사, 2013년 2월 12일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차 핵실험 강행 등 문명의 시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나니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연례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한미 키 리졸브와 독수리훈련을 ‘북침 핵전쟁’을 위한 것이라며 ‘정전협정 백지화’를 주장하고 ‘군 직통전화’를 끊는가 하면 ‘1호 전투근무태세’ 발령 및 전시상태 돌입을 선언하는 등 한반도의 위기를 최고조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철없는 김정은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 시간에도 굶주리고 있는 수백만의 북한 주민을 위하여, 한반도 평화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이제 대한민국은 물론 미국, 중국 등 주변 강대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특단의 조치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이다. 즉, 김정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김정은의 통치수단을 무력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군사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통치수단에 대하여 살펴보면 국가지도자는 플라톤이 말한 지혜로 또는 맹자가 말한 덕으로, 아니면 후진국 지도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채찍과 당근으로 강압과 돈에 의한 통치를 한다. 김정은이 지혜나 덕으로 북한을 통치할 리 만무하니 강압과 돈으로 다스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강압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면 할수록 북한 주민들로부터 증오를 받을 것이고 증오를 받으면 받을수록 김정은의 생명은 단축되기 때문이다. 남은 통치수단인 자금 즉 돈줄을 차단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동안 UN안보리 결의안 1718호, 1874호를 비롯 우리 정부의 2010년 ‘5.24조치’ 등 여러 가지 제재 방안 가운데서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것은 2005년 북한의 돈세탁 창구로 지목하고 자금거래를 동결시켜 북한에게 피 말리는 고통을 가했던 BDA식의 강도 높은 금융제재였다. 이를 상기하여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조로 북한 자금추적 전담조직을 창설하고 거래은행 결제시스템을 중단하는 등 초강력 자금 차단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유일한 통치 수단이 끊기니 정권 생명이 단축될 것은 분명하고 김정은 체제 붕괴는 초읽기에 들어갈 것이다. 이와 함께 해상봉쇄는 물론 북한이 두려워하는 B-52ㆍB-2 폭격기, 핵잠수함, 핵 항공모함 등 군사적 옵션도 부가하여 핵개발을 포함한 그 어떤 도발도 김정은 정권 붕괴로 이어진다는 확실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두번째 방안은 군사적인 방법으로 김정은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도하고 주변 강국의 공조 아래 특수부대를 북한에 침투시켜 김정은을 제거하는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여 파키스탄에서 처단한 오사마 빈 라덴의 경우를 본다면 비현실적인 대안은 아닐 것이다. 김정은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새로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보다 유연한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추진하고 있다. 김정은이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수용이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남·북간에 핵ㆍ인권 등 이슈에 대화로 신뢰를 쌓고, 신뢰가 쌓이면 교류협력을 강화하고, 교류협력이 활성화되면 북한에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보다 폭넓은 지원을 통하여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급진적이 아니라 점진적인 것이고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인 것이기에 김정은도 여유를 가지고 수용할 수 있는 최적 방안이다. 따라서 김정은은 이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수용하는 것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김정은이 죽는 길을 택할 것인지 사는 길을 택할 것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다. 만일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김정은의 돈줄을 끊거나 군사적인 방법으로 세계평화의 암적 존재인 김정은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윤종성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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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2 천안함 영령들이 北 응징의 길에 동참할 것이다
3년 전인 2010년 3월 26일 밤 9시 22분, 승조원 104명을 태운 천안함이 백령도 해역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심이 낮고 유속이 빠르기로 소문난 백령도 해역이지만 유속이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정조(停潮) 시간대도 있다. 북한은 바로 이 시간대를 이용, 어뢰를 발사하여 천안함을 침몰시켰다. 46명의 용사들이 전사했고 선박 인양작업에 참여했던 UDT 대원도 순직했다. 서해에서만 3번이나 도발을 일으킨 북한인지라 천안함 폭침 초기에도 북한 소행일 것이라는 직감은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정부는 주권 국가로서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국제 민․관․군 합동조사단을 꾸렸다. 국내 12개 민간기관의 전문가 25명과 군 전문가 22명, 국회 추천 위원 3명, 그리고 미국ㆍ호주ㆍ영국ㆍ스웨덴 의 전문가 24명 등 총 74명이 조사에 참여했다. 약 두 달 동안 심도 깊은 물리적 조사와 과학적 실험이 이루어졌으며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결정적 증거도 찾아냈다. 쌍끌이 어선이 천안함 폭침 해역을 샅샅이 뒤져서 북한 어뢰의 추진체를 찾아냈고 추진체 내부에서 “1번”이라고 쓰여진 북한체 글씨도 찾아냈다. 합조단은 5월 20일, 천안함은 고성능 폭약 250㎏ 규모의 음향추적 중어뢰(CHT-02D)의 수중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 효과에 의해 절단되어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소위 말하는 ‘천안함 괴담’이 인터넷 토론방을 도배했다. 심지어 한국의 어떤 시민단체는 합조단 조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개서한과 27쪽짜리 반박보고서를 안보리 15개 이사국에게 보내기도 했다. 안보리 결의를 통해 북한의 만행을 도출하려 했던 한국의 의지는 안보리 의장성명을 이끌어내는데 그쳤다. 안보리 이사국들은 “우리를 설득하기 전에 너희 국민들부터 이해시켜라” 이것이 47명의 용사들을 잃고도 정부와 국민들이 들어야 했던 수모였다. 그 후 같은 해인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이 있고 난 후 천안함 괴담은 많이 사그라졌다. CCTV를 통해 북한의 포탄이 떨어져 폭발하는 장면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김정일의 함박웃음이 수십 차례 보도되었다. 자신이 직접 지시한 만행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시민’들이 북한 소행에 대해 오히려 의문을 제기하고 안보리 결의마저 좌절시켰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북한에게 천안함은 다시 저지르고 싶은 ‘살인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살인의 추억’이 다시 현실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3년전과 차이가 있다면 은밀한 살인이 아니라 연평도와 같은 공개적 살인을 공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UN 안보리 결의안 2094호가 채택되는 시점을 전후하여 정전협정 백지화, 불가침 합의 무효화, 비핵화 선언 폐기와 함께 심지어 핵무기로 서울을 공격하겠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원산에 병력과 장비가 집결하는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전면전을 일으켜 한국을 “벌초”할 태세도 보여주고 있다. 3년 전에도 키 리졸브 훈련이 끝날 무렵 북한은 천안함을 침몰시켰다. 이번에도 북한은 핵실험에 대한 UN 안보리 제재와 키 리졸브 훈련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반성과 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도발을 외치고 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북한의 공언대로 북한은 또 다시 기습공격의 시기와 장소, 수단과 방법을 택하여 도발할 것이다. 김정은이 오판해서는 안 된다. 기습공격은 성공할 수도 있지만 한국의 대응이 옛날처럼 어수룩하지 않을 것이다. 도발원점과 지원세력, 그리고 그 지휘부까지 응징할 태세를 갖추고 있고 공격 받은 부대는 상부에 보고 하지 않고 곧바로 보복하도록 되어 있다. 국민들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어 옛날과 다르다. 그러니 이미 한줌세력으로 몰락한 종북세력에 대한 기대도 하지 마라. 천안함의 호국 영령들도 응징의 길에 동참할 것임을 잊지 마라. 김 열 수(성신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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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0 독재유지와 미군철수를 겨냥한 북한 핵무장
북한이 결국 제3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2006년과 2009년 두차례 플루토늄 방식의 핵실험에 이어 이번에는 고농축우라늄(HEU) 방식의 소형핵탄두 실험인 것으로 예측된다. 북한은 2005년 핵보유국임을 공개 선언한 바 있었고 2010년 개정된 헌법에서는 핵보유국임을 명기했었다. 거듭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과 작년 은하 3호라는 장거리미사일 실험 성공에 뒤이은 3차 핵실험 성공이라면서 북한은 명실공히 핵무장국가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후 핵위기를 조성하며 핵개발에 박차를 가한지 20년만에 우리 한국은 이제 핵보유국 북한과 직접 맞서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 일본 등 주변국들이 가세한 20년간의 비핵화 노력도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실험 때마다 가동된 유엔(UN)안전보장이사회의 거듭된 경제제재 결의(1695, 1718, 1874 및 2087호)조치로도 북한의 핵보유 의지를 꺾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현재와 같은 방법으로는 핵폐기가 아니라 핵무기 강대국의 길만 열어줄 뿐이라는 사실이다. 먼저 우리는 북한이 핵개발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대남 군사우위 확보 및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서다. 한반도 북부의 2천만 우리 민족의 삶을 유린하고 문명파괴적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북한은 체제를 지킬 강력한 무기와 수단을 필요로 한다. 특히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에서 한국에 절대적으로 뒤지는 북한으로서는 한국이 시도할 수 없는 비대칭 군사전력인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서 군사균형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대남 군사우위에 서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북한은 대남 군사우위를 바탕으로 체제 온존과 대남위협을 감행함으로써 70년 가까이 계속된 개인숭배적 독재의 항구화를 기도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핵무기가 전적으로 미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킬 때까지는 핵보유를 포기를 하지 않겠다는 전략을 중국과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북한의 속내는 다르다. 어쨌든 중국은 지난 20년간 북한의 핵개발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대북 경제 및 군사제재를 일관되게 반대함으로써 유엔의 대북제재를 무력화시켜왔다. 북한에 각종 전략물자를 지원하며 북한체제의 후견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북한은 1천km가 넘는 국경을 함께하고 무역량 90%와 전략물자 전체를 의존하는 중국을 등에 업고 실질적 제재는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보란 듯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다. 북한의 이번 핵실험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이전과 달리 성명을 통해 강력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긴 했으나 한반도 안정을 고려해 대북제제를 꺼리면서 강경 압박에 우려감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북한의 핵개발이란 현재와 같은 악명높은 북한 독재체제를 지속시키면서 궁극적으론 주한미군의 철수를 관철시킬 목표를 향한 사실에 기반할 때만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중국은 폐쇄적 북한체제를 유지시키고 핵개발을 묵인하는 것이 자국의 국가이익에 심각한 손실을 야기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십 훼손만 가져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의 개방ㆍ개혁없이 중국의 발전도 더뎌질 수밖에 없고 동아시아의 번영공동체도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은 핵개발이 곧 북한체제 봉괴로 이어진다는 것을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 대가로 독재유지 및 군사문제와 관련된 모든 무역 및 금융거래 금지와 해상봉쇄라는 가장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북한의 핵무기 전략은 그들이 원하는 미군철수는 커녕 원치않는 한-미동맹만 더욱 강화시키고 한-미 군사력의 전진배치와 확고한 억지전력으로 핵무기 개발이 무용함을 확인시켜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전략은 무의미한 것이고 오히려 체제자멸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깊이 절감토록 할 때만이 북한은 핵도발을 포기하고 다른 생존방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번이야 말로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 광 동(나라정책연구원장)
한국시사 (전문가 그룹)
2013-02-20 정교한 북핵 종합대책 절실하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만류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기어코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로써 김정은 정권의 핵무장 의지가 일부 강대국의 설득만으론 꺾기 어려울 만큼 강하며, 또 핵개발이 더이상 용인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이 확인됐다. 그러한 나쁜 행동은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다 같이 협력할 의무가 있는 유엔 회원국 지위에 걸맞지 않은 것이며, 북한의 호전성과 막무가내적 태도를 드러낼 뿐이다. 이번 핵실험으로 북한이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 곧 무기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능력에 비춰 이대로 가다간 멀지 않은 시기에 핵무기의 실전배치도 현실화 될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는 물론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파괴하는 엄중한 안보위협 사태다. 때문에 작금 비상적(非常的) 상황 인식과 특단의 핵안보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우선 지난 20여년 동안 남한의 한반도 비핵화정책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 절실하다. 북한은 기만전술과 지연전술을 최대한 활용해 마침내 핵무장을 이룩했으며, 국제사회를 향해 핵보유국 지위를 강요하고 있다. 반면 남한은 정권의 입맛 따라 오락가락하는 대북정책을 전개해 왔고, 특히 DJ-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과도한 '퍼주기'를 통해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돕는 꼴이 됐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선 북핵문제를 둘러싼 보혁갈등은 여전하다. 이런 점에 착안해 박근혜 차기정부는 과거의 정책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는, 보다 정교한 대북정책을 입안, 추진해야 할 것이다. 첫째, 새 정부는 북핵문제의 위험성, 한반도 안보와 통일에 미칠 부정적 영향 등을 체계적으로 국민에게 홍보․설명함으로써 분열된 국론을 한데 모으고, 국민합의에 기초한 대북정책 추진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북핵문제는 NPT 등 핵비확산 규범과 관련 있는 국제문제임을 감안해서 국제공조의 틀 안에서 가능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비핵화를 최종목표로 삼되, 단기적으론 추가 핵실험 중지와 '미래 핵' 확산 저지에 중점을 두고 대북 핵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물론 한․미동맹과 연합정보자산을 핵안보대책의 골간으로 삼고, 중․일․러 등 이해관계국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셋째, 국제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대북 제재결의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지금까지 안보리는 제재 결의 2087호를 채택했으나, 북한은 개의치 않고 핵실험을 밀어붙였다. 따라서 앞으로는 중국의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또 핵개발은 체제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자충수라는 점을 북한 당국이 깨닫게 해야 한다. 넷째, 새 정부의 대북정책 구상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이 비핵화에 호응해 올 경우 화답하는 내용의 정책구상으로, 열린 '기회의 창'을 제공하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로선 최악의 상황에서도 반전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새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수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보완하는 이른바 Plan B(북한자유화정책 포함)를 만들어 운용하면 될 것이다. 다섯째, 2015년으로 예정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시기에 대해 연기를 고려해야 한다. 한미 연합사는 북한 핵무기에 대한 억지력을 갖춘 가장 효율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우산'을 강화하되, 북한의 핵공격 징후가 보일 경우 선제타격을 포함하는 '핵대비 작전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한반도 비핵화 실현 이전까지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경협 확대에 속도조절을 해야 한다. 끝으로 중국은 북한의 장래를 염두에 두고 북핵문제에 대응하고 있음을 감안해서 우리 정부는 중국의 우려를 씻어낼 수 있는 통일전략 대화를 개시하고, 이를 북핵정책과 결합하는 치밀한 대중외교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제성호(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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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우주개발 로드맵을 재점검해 보자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우주개발 역사를 새로 쓴 쾌거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은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해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KSLV-I) 나로호를 개발한 뒤 이제는 2018-2021년까지 자체 기술로 3단형 발사체(KSLV-II)를 발사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민적 여망에도 불구하고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하기까지 우주 발사체 개발이 난항을 겪어 온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험난한 길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나로호의 경우, 발사체의 핵심 1단 추진체 개발은 러시아가 전담하였으며 우리는 한러 우주기술보호협약으로 인해 일체의 기술이전을 받지 못한 채 러시아제 로켓 시제품(일명 앙가라 로켓)을 사들여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도 이번에 3차 발사가 성공한 이후 러시아와의 발사체 개발 협력은 종료되어 이제 새로이 자체 기술개발 및 국제협력을 모색해 봐야 한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우리 기술로 2018-2021년까지 발사체를 개발하기 위한 로드맵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70년대 미국으로부터 액체 연료 로켓인 델타 로켓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 위에 자체 기술을 더해 H-2 로켓 개발에 성공하여 이제는 우주개발 선진국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도 우주개발 종주국으로서 가장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발사체 개발 협력을 추진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우주분야는 기계, 재료, IT, 화학 등 제반 최고 과학기술이 집약되어야 하는 첨단 중의 첨단 분야로서 통합적 시스템 엔지니어링 프로세스가 요구되는데, 우주개발 분야에서 30여년간 종사한 경험에서 볼 때 러시아는 로켓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산업기반이 부족하여 민간 상업용 신기술 측면에서 서방국, 특히 미국과의 공동 협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가 미국과 우주개발 협력을 실시한다면 가장 앞선 위성용 발사체 신기술을 도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간ㆍ상업용 우주개발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상호 이익을 증진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동맹국으로서 미국은 그간 한국-러시아간 우주개발 협력에 대해 껄끄러운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당초 러시아와의 협력 아이디어는 미국과 관계가 소원했던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당시 시작된 것으로, 여기서 배제된 미국은 우주개발 시장에서 한국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동맹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하지만 십여년 전과 지금 정세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미국이 그 누구보다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환태평양 안보와 평화의 Linchpin(결합 쐐기)’으로 정의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대한민국을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에 버금가는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 북한의 핵ㆍ미사일 위협, 중국의 부상 및 일본의 정체 등으로 인해서다. 대한민국의 위성 발사체 개발은 이러한 한미관계를 또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최근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협상 과정에서 보듯 미국이 순순히 우리의 우주개발을 위한 기술협력에 나서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 정부나 기업 모두 상하 양면에서 접근노력을 강화해 나가야 하는 이유다. 위로부터는 대통령을 포함, 정부 최고위급에서 우주개발 협력에 대해 운을 떼면서 미국 정부의 동의를 얻도록 노력하며 아래로부터는 사전에 우주개발 실무진, 업체들간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통해 수출 및 기술이전 가능 여부를 타진하고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특히 미국 정부는 우주항공 분야의 기술과 제품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하고 있어 세심한 단계적 접근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이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우주발사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한미 미사일지침, MTCR(미사일기술 통제체제)처럼 군사용 로켓 분야의 수출통제 뿐만 아니라 민간 상업 분야라도 △기술분야별 수출 라이선스 및 △외국에 기술지원을 행하기 위한 TAA(기술지원협정) 등 2중, 3중으로 부과되어 있는 규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먼저 우주개발 실무진 차원에서 미국 당국 및 기업들과 대화채널을 구축하고 이들과의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시작해 보자. 이는 미국 내에서 우주개발 분야에 종사해온 동포들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한국형 우주발사체 개발 협력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규제에 어디서 걸리는지부터 파악해 보자. 정부도 미국과 우주개발 협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 보자. 이처럼 우리가 상황별, 단계별로 상(정부) 하(실무진ㆍ업체 등) 양면에서 우주개발 선진국과의 협력 돌파구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 우주 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지름길임은 자명하다. 민병곤 (인공위성 시스템 솔루션 Nubron社 총괄매니저)
한국시사 (전문가 그룹)
2013-02-04 김정일의 잘못된 유산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쫒다(死公明走生仲達).” 이 말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때 자주 사용하는 고사성어다. 요즈음 돌아가는 북한 안팎의 사정을 보면, 이 고사성어처럼 ‘죽은 아버지 김정일’이 ‘산 아들 김정은’을 벼랑 끝으로 내쫓고 있는 형국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 1월 22일 유엔안보리는 작년 12월 12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규정하고, 대북 추가제재의 내용을 담은 제2087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해 북한은 외무성을 필두로, 국방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등 기관별로 잇달아 협박조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상황을 고조시켜 오고 있다. 김정일 사후 북한노동당 기관지 은 김정일의 3대 혁명유산으로 △인공위성 제작과 핵보유국 △새 세기 산업혁명 △김일성 민족의 정신력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이를 계승한 김정은이 정권의 공식 출범일에 맞춰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인공위성라고 주장하며 발사하고, 헌법을 수정해 전문에 ‘핵보유국’을 명시해 놓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북한이 작년 4월과 12월에 발사한 장거리 미사일은 죽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시에 만들어 놓은 것을 그의 사후에 3남인 김정은이 권력을 잡으면서 발사한 것에 불과하다. 북한이 쏘아 올렸다는 인공위성의 이름도 김정일을 상징하는 ‘광명성’이니, 죽은 김정일의 영향력을 실감케 하는 것이다. 결국 죽은 김정일이 만들어 놓은 장거리 미사일 유언은 산 김정은이 비정상적 북한체제를 이어받아 통치하는 결과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는 2월 16일은 김정일의 생일 71년을 맞이하는 이른바 ‘광명성절’이다. 2011년 12월 그의 사망 이후에 북한 당국은 70번째 생일인 2012년 2월 16일을 ‘광명성절’이라고 이름 짓고 약식열병식을 여는 등 김씨 일가의 가계 우상화를 위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올해도 변함없이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성대한 경축행사를 열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북한 김정은이 중국까지 찬성한 대북제제 결의안에 맞서 죽은 아버지의 생일날에 임박해 3차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정은이 새 세기 산업혁명을 내걸고 추진한 각종 경제조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에 초조해진 북한당국이 3차 핵실험과 대남 도발 협박 등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켜 북한 주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하게 되면, 국제사회는 지금보다도 더 한층 강화된 대북제재를 실시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김정일은 살아서 ‘고난의 행군’과 선군정치로 북한주민들을 굶주림의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줘 죽어서도 나라 전체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게 되는 것이다. 김정은은 허무맹랑한 가계 우상화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아버지 김정일의 위험한 유산을 버려야 한다. 부족한 국가재원을 탕진해 가며 무익한 3차 핵실험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내건 ‘인민생활의 향상’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핵실험할 돈으로 설날 하루라도 주민들이 따듯한 밥과 국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도록 식량배급을 늘려주는 편이 체제 파국을 피하는 최소한의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