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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베이포럼)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 오클랜드 경찰 총격사건이 예사롭지 않다. 수갑이 채워진 상태의 흑인청년 오스카 그랜드(사진)를 엎드려 앉힌 상태에서 사살한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오클랜드 시민은 물론 미국전체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특히 사살장면과 수갑이 채워진 손이 동영상을 통해 언론에 보도 되면서 경찰의 총격에 미국전체가 부글부글하고 있다. 지난주 오클랜드 다운타운에선 경찰이 데모대를 상대로 강력한 진압활동을 펼쳤지만 ‘Justice(정의)’를 외치는 데모대는 거리에 주차된 차에 불을 지르고 상점유리창을 깨트리는 등 폭력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부 피해 상인들은 상가파손 사태를 개탄하며 시위대의 초점이 흐려질까 두렵다는 표현도 했다. 흑백의 다른 시각 이번 사태를 보는 흑백의 시각은 매우 대조적이다. 일부 백인들은 이번 경찰총격사건은 경찰관의 실수(wrongful death)였지, 고의성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 주변이 어두웠고 상당히 흥분된 상태여서 판단 집중력이 떨어진 환경 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수갑을 채운 피의자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겠냐는 논리다. 아마도 스팅건으로 착각하고 깊은 생각 없이 총을 쏘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경찰과 검찰에서 이미 관련 경찰관 안전을 위하여 구속했고 현장 증인들 수사를 시작해 사건의 윤곽은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휘발성이 너무나 강한 사건이라 중간 진상발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뒷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로드니 킹 폭동’도 사건발생 직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재판에게 폭력경찰들에 대한 무죄평결이 나온 직후에 터진 경험이 있어 이번 사건은 재판과정에 따라 폭발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만에 하나 경찰관이 실수로 피해자를 사살했다는 증언이 나오면 재판부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있다. 근무 중 고의성이 아닌 실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보통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배심원이 그런 실수를 인정 하느냐 에 따라 경찰관의 운명은 물론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인사회에서 이번 사건에 특별히 촉각을 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오클랜드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다운타운 샌드위치 샵의 반 이상은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들에 대한 피해가 크게 우려 되고 있으며, 오클랜드 곳곳에서 흑인고객을 상대로 식당과 마켓 그리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 경찰들에 의한 흑인 총격사건이 어제와 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없었다. 새해 이브에 젊은이들이 패싸움을 했던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해를 맞이 한 기쁨에 다소 흥분되고 음주도 했을 수 있어 말다툼이나 몸싸움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번 더블린 한인주택에서 식칼을 들은 한국방문객이 경찰의 총격에 사살된 일이 잊혀지기도 전에 또다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대하고 나니 경찰이 누구를 위한 집단인지 다시 비쳐진다. 더블린사건 당시 경찰과 언어의 소통에 문제는 있었지만 거리상 경찰관에 위험을 줄 만큼 위급한 환경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도 이미 수갑이 채워졌는데 무슨 위험이 경찰에 있다고 피의자를 사살했느냐는 주장이다. 결국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마음 어딘가에 잠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역사적인 오바마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부 흑인커뮤니티에선 오마바 대통령을 선출한 만큼 흑인들도 사회의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자성과 각오를 다짐한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도 들리고 있었는데…… 유비무환(有備無患)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다. 우연인지 고의적인지 법원이 결정할 일이지만 한인사회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고 흑인사회와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내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실제 꼭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과거 역사 속에는 흑, 백인이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 대결도 마다했지만 이제 두 집단이 맞짱뜨고 싸우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서로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백인은 항상 흑인들에게 빚을 진 느낌을 갖고 있으며, 흑인은 백인들의 잔인함에 겁을 내고 있다. 결국 그들의 싸움에는 감정을 소화 시키는 희생양을 항상 필요로 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발생한 ‘로드니 킹 폭동’도 결국 한인사회라는 희생양이 두 집단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진 사건이다. 이번 사건의 흐름을 언론에서도 철저히 감시 하겠지만 한인단체에서도 조속히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초기 재판과정에서부터 적절한 논평 등 우리의 목소리를 내 흑인 사회에 알리도록 해야 한다. 흑인커뮤니티도 다른 소수사회처럼 상당히 소통이 어렵고, 불신이 많은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런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향적으로 상호간 인적 교류를 넓히고, 사건재발을 모색하는 방안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등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이번 경찰 총격사건이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 방관자 입장이 아닌 당사자로서 유비무환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로스엔젤레스 폭동 당시 한인사회가 초토화를 당했던 그런 비극이 오클랜드에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오클랜드 일부 한인업소는 시청앞에서 데모하는 날에는 피해를 우려해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깨어 있는 자만이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옛 지혜를 잊지 말자. (dyk47@yahoo.com)
2009-01-07 모나크 나비의 신비
새해 연휴를 맞아 샌프란시스코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몬트레이 베이를 다시 찾았다. 지난 12월 19일 몬트레이에서 한인회 주최 한국국악교육원 예술단 초청 ‘송년의 밤’ 공연에 있었다. 특별히 찾은 이유는 그 동안 준비해온 모나크 나비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다. 예정 시간을 넘겨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따듯한 분의 도움을 받아 생생한 현지 취재를 할 수 있었다. 나비의 이동 요즘 같은 추위에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몬트레이 반도 남단에 위치한 패시픽 그로브에 사는 주민들과 이곳을 특별히 찾는 관광객 이다. 그 이유는 나비가 추위와 찬 바람에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패시픽 그로브는 몬트레이 지역 내에서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역임한 카멜시와 함께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다. 카멜은 페블비치와 골프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살리나스(Salinas)가 죤 스타인백의 짖은 향기에 묻혀 있다면 패시픽 그로브는 모나크 나비(monarch butterfly / 왕나비)가 매년 겨울을 나기 위하여 찾는 나비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날아온 모나크 나비 숫자는 약1만8천 마리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약 8~9천 마리가 찾아 왔다니 올해엔 두 배로 찾아온 셈이다. 이들 모나크 나비는 대부분 알라스카에서 날아온다 약 2천 마일 거리를 날아 온다니 선 듯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비의 날개 크기는 전부 합쳐도 대부분 4인치를 넘지 못한다. 그런 가녀린 날개로 날아 오다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미스터리다. 전문가들은 모나크 나비가 스스로 날개를 펄럭이면서 오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마도 지구의 기류를 타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라스카의 빙하가 녹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캐스케이트 산맥까지 흘러내려 특이한 기후를 형성하는 것도 기류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모나크 나비가 높은 록키산맥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나비는 겨울철이 다가 오면 멕시코로 이동하고 서부 지역 알라스카 서식 나비는 캘리포니아 주로 온다. 이 말은 나비가 동서로 이동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자연의 기적 미국 전역에 약 1억 마리의 모나크 나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나비 수명은 생각보다 짧다. 모나크 나비의 일생은 암컷이 유액식물인 밀크위드(milkweed plant) 잎사귀 위에 알을 낳으면 약 4일이 지나 부화하고 애벌레로 약 2주간 지내는데 이때 오직 밀크위드 잎사귀만 먹는다. 나비 애벌레는 밀키위드 잎사귀만 먹기 때문에 이 나무가 고갈되면 모나크 나비도 자연스럽게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밖에 있다. 일부 지역에서 밀크위드 유화나무가 잡목으로 분류돼 벌목되기도 한다. 밀크위드 잎사귀는 강한 독성이 있어 새나 동물이 먹으면 죽는데 유독 왕 나비 애벌레에겐 어떤 중독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애벌레가 이런 독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나 다른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애벌레 후 번데기 같은 용기에 담겨 약 2주간 나무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때 번데기 속에서 애벌레 녹색에서 오랜지와 검정색으로 변화되어 용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마침내 세상으로 나온 나비는 대개 약 2-6주의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알라스카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나아오는 모나크 나비의 수명은 약6-8개월로 알려지고 있다. 즉 같은 나비라도 환경에 따라 수명이 다른 점이 있다. 알라스카에서 날아 온 모나크 나비들은 지금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데 2~3월이 되면 교미가 끝나고 암컷만 다시 샌후아퀸 밸리로 이동해 알을 낳고 죽게 된다. 그러면 다시 알이 부화하고 나비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4대 후에 알라스카를 거쳐 중 캘리포니아로 돌아 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수수께끼로 남는 부분은 4대가 거친 후에 날아 오는 나비가 대부분 똑 같은 나무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떻게 4대 후 증조할아버지의 자리를 알겠냐는 뜻이다. ‘자연의 기적(nature’s miracle)’으로 불리는 이 숙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나비가 대대로 슈퍼 칩을 물려주고 있을지도. 모나크 나비의 이동이 스펙타클하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동이 철새 떼처럼 웅장하게 보이지 않고 수백 마리가 뭉쳐 작은 포도송이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유화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어 육안으로 관찰 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차가운 바람과 비에 모나크 나비가 대단히 약하다. 그래서 따듯한 날이 아니면 왕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날아가는 나비를 보기가 쉽지 않다. 패시픽 그로브에 가장 많이 온 것은 1951~1952으로 약 1백만 마리였다는 풍문도 있으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패시픽 그로브외에 모나크 나비 있는 지역으로는 산타크루즈, 피스모 비치, 멀리 산타바바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시픽 그로브지역에서 해마다 10월 첫째 주 토요일을 모나크 나비 기념일로 정하여 butterfly parade 행사를 하고 있다. 모나크 나비의 홈 커밍(home coming)을 환영하는 뜻이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패시픽 그로브를 모나크 나비 보호구역(butterfly sanctuary)으로 정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모나크 나비를 잡거나 소음으로 방해할 경우 5백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오는 2~3월이 오면 모나크 나비의 여정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암컷 모나크 나비가 모두 떠나고 수컷만 남아 자신의 수명까지 살다가 죽게 된다. 이번 모나크 나비를 취재하면서 관심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모나크 나비가 서식하고 있는 패시픽 그로브에서 Butterfly Grove Inn을 운영하는 에릭 박선생님이 주신 사진과 정보에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감사 드리며 그 외 협조해 주신 다른 분들에게도 같은 뜻을 전해 드린다. 날씨 좋은날 왕나비들이 떠나기 전에 꼭 알현을 해야 되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드림 / 미주주간현대 (dyk47@yahoo.com)
2009-01-03 사랑의 빚
새해를 맞으며 기대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많지만 지나간 일들을 아쉬워하게 된다. 얼마전 한 작가가 옛 것은 잊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애용하던 향수를 찾아 헤맨 이야기를 적은 기사를 보았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옛 것이라고 다 보내고 다 잊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간혹 가다 옛 사람 옛 것을 추억하며 센티멘탈할 수 있는 순간도 있어 인생이 더 풍요해 지는 것 같다.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에 아버지가 과거 애용하시던, 더 이상 팔지 않는 향수를 드리고자 각방으로 노력하다 결국 찾지 못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찾게 되어 그 향기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발견했다는 글을 보며 떠오른 것은 모리츠 (Moritz) 라는 식당이다. 이 식당은 내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많이 담겨 있는 곳이다. 대학가 콘도 빌딩 1층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전시하고 한 켠에서는 누군가 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비틀즈 노래를 많이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음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외식 경험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그 식당에 가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우아한 곳에 가는 것 같은 행복감을 주었었다. 이 식당을 내게 처음 소개해준 사람은 애칭이 디디 (Dee Dee) 라는 대학 선배였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때 불어 연수를 갔다가 만난 몇살위의 멋쟁이였는데, 사교적으로 서투른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친 언니처럼 보살펴 주었었다. 나중에 내가 본인이 다니는 대학에 지망하게 된 것을 알고 대학 방문을 갔을때 이 모리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었었다. 디디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고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는데다 머리도 아주 좋아 나는 늘 그녀에게 감탄했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디디가 좋아하고 소개해준 식당이라 모리츠는 내게 특별한 곳이 되었던 것 같다.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디디는 사실 근육이 후퇴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유전병이라 친척중 두명이 그 병으로 죽었고 본인도 휴학을 하기도 하고 물리 치료등을 받으며 늘 병과 싸우고 있었다. 당장 몇년안에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언제 악화될 지 몰라 미래를 계획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디디는 그런 중에도 늘 무엇인가 내게 베풀어 주고 새로운 경험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사회 물정이나 대인 관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고마워 하면서도 감사의 표현조차 제대로 못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되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디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의대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건강때문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다 결혼에 이르렀고 다른 도시로 이사간 후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카드까지 받았었다. 이후 서로 이사를 거듭하다 연락처를 잃게 되고 그녀의 소식도 끊겼다. 그녀를 찾아 보려고 의사 디렉토리로 남편이름을 찾아 보기도 했는데 연락처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을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때 마다 찾아 가던 모리츠 또한 어느날 연락해 보니 문을 닫았다. 대학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던 모리츠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큰 것은 디디 처럼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이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더 이상 갚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개중에는 아직도 연락이 되고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너무 많은 이들과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랑의 빚의 무게도 더 늘고 있다. 억울했던 일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분은 시간이 가면 잊혀 지는데 사랑을 받고 미처 보답하지 못한 미안함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그분들을 찾아 볼 수 있는 확률이, 이제 와서 제대로 감사를 표현할 만한 방법을 찾을 확률이 점점 더 줄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올 겨울에는 감사한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또 새해에는 직접 갚지 못한 사랑의 빚을 간접적으로 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그래야 디디를 추억할 때 미안함 보다 고마움이 더 클 것 같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12-05 [베이포럼] 블랙 프라이데이
불경기 속에 모두가 어렵다고 한다. 요즘 장사가 잘 된다는 사람은 ‘역적’이라고 할 만큼 경기가 침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추수감사절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터키고기 먹는 날이기 보다 그 다음날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에 녹아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일년 중 가장 바쁜 쇼핑데이로 알려져 있을뿐더러, 그 날 매출이 얼마를 기록했느냐에 따라 크리스마스 전체 경기를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으로 저조한 실적을 예상 했으나 의외로 작년 매출 1백3억 달러를 돌파한 1백6억 달러를 3일 동안 기록해 경제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일단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 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신용경색 쓰나미를 불러 있으킨 미국 발 서프라임 융자는 아직까지 바닥을 쳤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어 언제까지 부실 주택융자 뒷처리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부시정부는 불투명한 경기전망에 뚜렸한 대책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금융기관과 채권회사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일까지 생각하기 힘든 현실의 국민은 멀지 않은 후일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엄청난 빚부담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돈만 풀라고 소리치고 있다. 재무부가 이미 7천억 달러를 퍼 붓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8천억 달러에 가까운 공적 자금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퍼부어 미국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실제 소비자에게 얼마만큼 혜택이 올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은행은 이런 저런 뭉칫돈으로 넘쳐 나는데 정작 밑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 돈을 풀라고 해도 은행은 끔적도 하지 않는다. 결국 정부로부터 공적 자금은 받은 은행들이 가계 융자를 외면한 채 배째라고 내밀고 있다. 경기부양책으로 도로와 다리를 고치고 공공사업을 일으켜 돈을 풀겠다고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지난 의회에서 주장했지만 찬, 반이 맞서 아직까지 결론을 못 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의회를 완전히 장악한 민주당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 투여에 못마땅한 야당 공화당 반대보다 자체 분열이 더욱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민주당내에서 경기회복에 대한 방안을 놓고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 시급한 정책수립이 용이치 않다고 한다. 민주당내 분열의 가장 큰 이유는 저마다 자기 선거구 입장을 먼저 처리하려는 지역 이기주의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가 나쁘다 보니 시급한 국가 경제회복보다 실적이 나는 자신의 선거구 경기회복이 더 시급한 것이다. 결국 작은 것을 욕심 내 큰 것을 잃을 판이다. 오바마 경제팀 오바마 당선자가 새로이 경제팀을 구성했다. 미국 최고의 인재로 구성된 드림 팀이라고 할 만큼 초호화판 오바마 경제팀은 이미 최악의 경제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으나 지름길이 없다고 한다. 결국 기업부도와 직장감원 및 주택차압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노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국민들이 받을 고통에 대한 우려에 공감하지만 방법이 여의치 않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람들은 연말연시 홀리데이 시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년 중 가족들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기에 이 기간 중 감원은 피하자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아직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기업의 직원들은 다가오는 신년이 더욱 무섭다고 한다. 이미 일부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시작했지만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피를 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직장인은 내년 6월까지 구조조정만 면하면 일단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시간표도 나왔다. 기업도 6월까지 살아나면 더 이상 경기악화는 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큰 기업이 현금확보에 사활을 걸었다는 말도 6월까지 견디자는 뜻과 동일하다. 동포사회의 경기도 미 주류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나 그 동안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미국사람보다 맷집은 더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국경제가 아무리 좋아도 동포사회 경기는 그날이 그날이었던 관계로 불경기에 상당히 익숙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동포사회의 특수성 즉 혈연과 지연, 학연 등으로 상부상조하는 보호막이 그런대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도 어려운 때 효력을 발휘한다. 불경기를 이기는 방법으로 전문가들은 몸을 가볍게 하라고 한다. 털어 버릴 것은 가급적 빨리 털어야 장거리를 뛸 수 있다는 뜻이다. 블랙프라이데이 매상이 예상을 뛰는 긍정적인 수치가 나오고, 오바마 경제팀이 머리를 짜내고 있다니 좋은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의 끈 만큼은 놓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내년 6월까지 잘 견디는 지혜라도 전수 받았으면 좋겠다. (dyk47@yahoo.com)
2008-11-02 환상적인 가을여행 (June Lake 가는 길)
SFKorean에 `등대`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주말여행을 다녀오시고 자유게시판에 올려준 글입니다. 지난 주말인 토요일... 시월도 막바지인데 너무 좋은 날씨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Sonora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드라이브 코스로는 좋은 것 같지만 우리가 원하던 가을경치는 별로라 Eastern Sierra 지역인 US 395번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120번을 따라 요세미티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빠른 것 같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Sonora Pass쪽인108번을 택했다. 깊은 산속으로 구비구비 흐르는 계곡따라 노란색의 아스펜과 송어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침 햇살에 비치는 노란색잎들이 투명하게 맑아 눈이 부시게 화려하게 보이기도... 가을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한가로운 목장의 아침 풍경에도... 드넓게 펼쳐진 평원에도... 이미 떨어져버린 나뭇잎으로 드러난 가지들의 앙상한 모습조차도 내눈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사실 10월 초에 가려고 했었지만 눈이 온다는 정보에 포기했었는데 그때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가을 들꽃의 아름다운 모습... Leavitt Meadows and the West Walker River 의 광활한 모습... 역시 눈보다 좋은 카메라는 없는 듯 눈으로 보이는 느낌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어 아쉽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형상도 신기했지만 한국의 불상같은(?) 모습의 바위를 발견하기도... Mono Lake 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Vista Point... 엷은 안개가 펴져있어 선명하지는 않은데 이곳은 동틀 무렵에 찍은 사진들이 좋다고 한다. 이 호수는 화산활동에 의해 75만-100만년전에 생성된 것으로 북미 대륙에서 오래된 호수 중 하나이며 65 평방마일에 달하는 크기이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물줄기가 들어오지만 뜨거운 사막기후로 인해 물이 증발되며 소금, 미네랄등만 침전되는 상태로 바닷물 5배의 염분과 알칼리 함유량으로 인해 물고기같은 생물이 서식할 수 없으며 특별한 종류의 brine 새우가 지구상에서 이곳에만 살고 있다고 한다. 바람이 있는 날에는 파도가 심하다는데 이 날은 너무 잔잔하여 거울같은 수면위에 비친 산그림자가 더 고즈넉한 느낌이다. Mono Lake 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길... 계곡의 능선을 따라 노란잎의 나무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 Grant Lake 을 끼고 돌아가는 길...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아서 더욱 아름다운 길인 것 같다. Silver Lake 쪽으로 가는 길... 구비구비 길을 돌아 나올 때마다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고... 또 다른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차를 세울만한 곳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저마다 좋은 경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너무나 아름다운 Gull Lake...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높은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맑은 호수의 정경... 좋은 날씨와 맑은 공기, 그리고 북적이는 인파도 별로 없는 호젓한 산속의 호숫가를 달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그림같은 풍경... June Lake... 노란색의 나뭇잎뒤로 햇살 비친 은빛 물결의 파란 호수가 더욱 잔잔해 보이고... June Lake 주변에 Gull Lake, Silver Lake, Pyramid Lake, Grant Lake 등 크고 작은 호수들이 주위에 많아 관광객들의 레저시설이 잘되어 있다고 한다. 노란 단풍물결과 호수들의 푸른 옥수의 물 빛깔... 시골 마을의 한적한 풍경은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신이 만들어 준 자연에 감사하며 서둘러 돌아 나오는 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108번... 길을 살짝 잘못들어 잠시 헤매던 중에 벌써 캄캄해져서 9624 feet 의 고산준봉을 넘어 올 때는 차안에서도 약간 무서움증이... 그러나 바로 머리위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여태 그렇게 선명한 빛깔로 쏟아지는 은하수를 본 기억이 없다. '아, 너무 좋다!' 더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 사진은 '캐논 EOS'(DSLR) 와 일명 똑딱이라고 하는 디카로 찍은 것임 등대님이 자유게시판에 쓰신글
2008-10-24 사라 페일린 (Sarah Palin) 과 신여성상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선거의 결과를 떠나 이번 선거 유세에서 흥미로왔던 점은 부통령 후보인 사라 페일린과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었다. 사라 페일린은 보통 우리가 보아온 지도자급 여성들과 달리 대학원을 가지도 않았고, 어려서 결혼해 젊은나이에 아이가 다섯이고, 페미니스트들이 우스개거리로 생각하는 미인대회 출신인데다, 지성인들이 반대하는 사냥을 즐기고 신앙에 대해 거리낌없이 솔직하다. 사라 페일린의 등장으로 다시 선거에 관심을 갖게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인터넷과 TV 신문 지상에는 인신 모독에 가까운 평가도 눈에 자주 띈다. 정치적 엘리트 주의자들이 많다는 워싱턴, 뉴욕, 실리콘 밸리, 헐리우드에서는 사라 페일린이 ‘너무 평범하다’ (즉 본인보다 무식하다), ‘알라스카에서나 통했다’ (본인이 사는 곳과 상대않되는 시골 출신이다), ‘예쁜척한다’ (똑똑한 여자들은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다) 등의 표현을 쉽게 듣는다. 여성의 부통령 후보 등장을 축하하며 약자에 대해 공평해야할 페미니스트들이 더 비판적인 모습을 보며, 같은 여자의 편을 들면 약해보일까 걱정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아이러니와 평균 페미니스트보다 보수적인 의견을 갖은 여성을 비하하는 편협함을 보았다. 사라 페일린이 홍보하는 정치적 견해는 내 개인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내가 아는 누구의 인생 방식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등장이 신선했다. 경험은 없고 욕심이 앞선다는 평도 있지만 2005년에 상원의원이 되어 자서전을 두개나 내는 동안 별다른 입법 활동이 없었던 오바마 상원의원보다 경험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후보로서 모자라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다 할 수 있는 여성도 있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도전을 받았었다. 불만이 있다면 성공적인 여성의 기준을 다섯명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한 주의 주지사로서의 역할까지 잘 감당하는 수퍼 우먼의 수준으로 올렸다는 것에 있다. 내 시대의 여성들은 커리어와 가정을 둘 다 성공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의 생각일 수 있으나, 마치 우물은 하나만 파야 한다는 기분으로 가정과 커리어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둘다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부담을 늘 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일에 파묻혀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생활의 밸런스를 깨는 행동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라고 느끼고 만족해 했고, 아이 하나 키우는 것만도 벅차고 감사해서 더 큰 가족생활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마치 바다로 수영을 나가기 전 파도가 너무 세니 나는 수영장에서만 수영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과 매한가지 아닐까? 그동안 나 자신을 상자안에 가두며 살아 온것은 아닌가 사라 페일린을 통해 돌아보게 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전진해야 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희생없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희생’에 대한 강조가 되지 않았는가 돌아 보게 된다. 사라 페일린의 인생 이야기를 보며, 수퍼 우먼 보다는 굴레에서 벗어난 여성상을 얻고 싶다. 좀 더 현실을 벗어난 가능성을 꿈꾸고 조금 덜 혼자 하려는 완벽 주의를 버린 여성상을 떠올린다. 죄책감 없이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고, 약해 보인다는 두려움 없이 도움을 요청할 줄 알고,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는 여성상을 그려본다. 또 힐러리 클린튼과 사라 페일린의 선거 운동 동안 비록 공인이더라도 인격체인 한 사람을 너무 쉽게 비하하는 풍조를 보며, 나와 다른 모습의 생활을 사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 나와 다른 가치관을 선택한 이들에 대한 존중이 넘쳐나는 커뮤니티도 꿈꾸어 본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10-09 김동열 칼럼 / 최진실과 자살
지난 호 신문 편집이 마감시간보다 2시간 앞당겨 끝났다. 평상시 마감시간이 오후 5시였는데 전날 준비를 많이 한 탓인지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 직원들에게 고생했다면서 판을 접었는데 오후 4시가 넘어 중국인 인쇄소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불길한 말을 들었다. 내일 아침에 인쇄하는 다른 한국신문에서 커버를 도로 가져갔는데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 난 것 같다는 얘기다. 암살사건 같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인터넷을 보니 최진실 자살 사건으로 막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최진실은 상당한 뉴스거리다. 물론 과거 대통령 암살사건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해도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연예인의 죽음이기 때문에 뉴스 비중은 그 만큼 크다. 모처럼 신문 편집이 일찍 끝나 그런대로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에 찾아온 비보는 확실히 사람을 맥 빠지게 했다. 인쇄소에 커버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가능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이미 윤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런 손해를 감수하겠냐는 물음에 선뜻 ‘다시 하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매주 제 시간에 마감을 못해 인쇄소로부터 재촉을 받았는데 오늘 모처럼 마감시간을 앞당겼더니 그 결과는 큰 기사를 놓친 신문을 만든 것이다. 모든 인간지사가 그렇겠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상일이 돌아갈 때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결과 앞에 사람의 노력은 너무나 별볼일 없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너무 흔해진 자살 최진실의 자살이 있기 전 안재환이라는 젊은 연예인의 자살로 슬픔에 빠진 한국사회가 이제 겨우 안정을 찾는가 했는데 더 큰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자살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안재환의 자살과 연관되 시달려온 사채설 악플에 분노해 음주 후 충동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다. 세계 수준급인 한국형 인터넷 악플에 대한 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자도 4년 전 매주 한인 웹사이트에 글을 약 1년여 동안 올린 적이 있었다. 매주 새 글을 올리면 보통 20-30개 정도의 댓글이 따라 붙는다. 동감의 글에는 인색하고 나머지는 글과 관계없이 대부분 욕설이다. 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찾을 수 없고 무명의 무차별 인신공격 악플로 가득하다. 댓글을 읽고 나면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화가 나고, 자신에 대한 부정확한 오해나 곡해도 걱정거리가 된다. 주위에선 글을 올리지 말라고 했지만 기자는 악플에 상관치 않고 매주 글을 쓰면 꼭 올렸다. 이것은 그림자 뒤에 숨어 기생하는 어둠의 사람들과의 싸움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DNA를 가진 사람들과의 다툼도 사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환자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최진실은 자살은 너무나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기자는 최진실이 나오는 드라마를 특히 좋아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이 대부분 똑순이 같은 역을 할 경우가 많았다. 착한 남편과 아이들을 이끌고 나가는 억척 주부의 역을 너무나 실감 있게 잘 표현했다. 그래서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는 기다려지고 또 연기자에 대한 호감도 컸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되고 ‘evil’을 꺼꾸로 하면 ‘live’가 된다. 거꾸로 하면 뜻이 다른 것처럼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자살이 자기의 표현하는 최후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세상을 등진 망자가 이제 무슨 결과를 들을 수 있겠나. 어느 누구라도 한번쯤은 산다는 의미도, 특별한 미련도 갖기 힘들 때가 있지만 창조주가 준 고귀한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한한 책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S씨의 죽음 지난달 초 우연히 S씨를 헤이워드식당 앞에서 만났다. 코가 깨진 차를 본 그는 보기 흉하니 걱정하지 말고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이도 있으니 깨끗한 옷차림처럼 깨끗한 차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말은 차에 무관심한 기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며칠 후 차를 가져갔다. 긴 머리에 가죽 모자가 눈에 거슬려 ‘좀 단정하게 하라’고 하니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마침 차가 다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가니 깨끗이 면도도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잘랐다. 잘 했다면서 ‘다음에 점심이라도 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가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 주면서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했다. 시계도, 재봉틀도, 카메라도 보여 주며 나중에 큰 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나누었다. 후일 골동품을 팔아 돈을 벌겠다며 생에 강한 애착심을 보였던 그가 자살을 했다니 정작 믿어지지 않는다. 왜들 죽음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나. 자살보다 더한 추악한 자기모욕은 없다. 너무나 흔해진 자살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아닐까. 그가 마지막으로 매끄럽게 고쳐준 자동차를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dyk47@yahoo.com)
2008-08-29 오늘의 양식
미국에서 흔히 보는 습관 중에 거슬리는 습관적 질문이 하나 있다. 사람을 만나면 지나치며 물어보는 의미 없는 ‘How are you?’ 라는 질문이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습관적으로 ‘Fine’ 이라고 대답하고, 질문을 던진 사람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Good’ 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대답할 여유도 없이 스쳐 지나쳐 간다. 학창시절 하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이 질문을 던질까 시험해 보려 ‘How are you?’ 라고 물어올 때 마다 ‘Bad’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열명중 한명 정도만 ‘Bad’ 라는 내 대답을 듣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이후 나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대화를 할 시간이 없으면 ‘How are you?’ 라는 인삿말 대신 ‘좋은 아침’을 말한다. 상대방이 듣던 말던 왠지 좋은 아침을 빌어주는 인삿말에 진심을 싣기가 더 쉬운것 같아서이다. 이와 달리 아주 작은 일이 울적한 기분을 바꾸어 주기도 한다. 지금은 운전을 하고 사무실에 갈때가 더 많지만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이나 맨하탄 미드타운에서 걸어서 사무실을 갈 때는 길가는 사람들을 통해 아침이 밝아지는 경험을 자주 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깨가 다을 것 처럼 바삐 걸어가다가도 이름 없는 얼굴들중 누군가는 눈에 미소를 담고 가고, 누군가는 아름답게 차리고 꽃을 들고 가고, 또 누군가는 커피샵 문을 열어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할 때 무표정했던 내 얼굴에도 미소가 돌게 된다. 또 나도 다른 이들에게 같은 친절을 베풀어 혹시라도 침울했던 사람의 기분을 북돋울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것 같은 사람에게도 힘이 빠지는 날이, 몸과 마음이 아픈 날이 있다. 그 기간이 하루가 아니라 한 달 또는 1년이 넘을 때도 있다. 하는 일마다 성공적인 것 같아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도 넘어질 때가 있다. 높이 올라갔을 수록 추락도 크게 아프게 한다.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친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기 어려운 친절은 고가의 선물이나 보기 힘든 배려가 아니라 내가 가장 작게 느껴졌을때 걸려온 한 통의 안부 전화였고 마음의 짐때문에 무거운 어깨로 걸어갈때 지나치는 사람이 보여준 친절이었다. 그들은 작은 격려가 무거운 그날을 “세상은 살만한 날”로 바꾸어 주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자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삼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도 드물고 특별히 가족들에게는 격려와 칭찬도 인색하다. 잘 움직이는 기계에도 기름칠을 해주어야 오래 잘 사용할 수 있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힘이 빠지지 않도록 윤활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경제는 어렵고, 정치 소식은 혼란하고, 이민법은 향상되지 않을수록 주변을 둘러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친절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영국 시인 존 단의 표현처럼 우리는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이며, 대륙의 귀퉁이가 쓸려 내려갈 때 우리도 쓸려 내려간다. 우리 모두는 작은 친절과 격려를 먹고 산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03-15 처음처럼
지나가다 ‘처음처럼’ 이라는 글자를 보고 신선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보니 소주 광고 였는데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었을 것 같다. 아마도 예전 맛에 대한 향수, 처음과 같은 자세로 열심히 만들겠다는 의지 내지는 깨끗하다는 뜻 등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심지어 소주도 이런 자세로 만드는데, 우리 인생에 처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에게는 role model 이 있는데, 중국에서 만났던 할머니 선생님이다. 내가 90년대에 중국의 소주대학에서 국제통상법을 가르칠때 내가 살던 외국인 선생들이 모여 사는 빌라 윗층에 사시던 플로리다 출신 미국인 선생님이 셨다. 교육학 박사로 교직에 계속 계시다 60세가 넘어서자 은퇴를 거부하고 중국에 와서 제2의 커리어를 쌓고 계시던 분이었다. 그당시 연세가 65세 가량 되셨었다. 어떻게 중국에 오실 결정을 하셨나고 여쭈어 보았더니 집안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부모님이 다 100살넘게 장수하셨고 고모도 100살이 넘게 건강하시다고 했는데, 교회 목사님이 고모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시는데 고모가 하셨다는 말씀이 걸작이다. “목사님, 내가 너무 장수해서 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이 내가 천국에 못 온줄 알까 걱정이에요.” 라고 하셨단다. 이렇듯 장수하는 집안이다 보니 60세가 넘어 본인의 정년 퇴직이 임박해 오자 이제 내가 은퇴하면 40년은 더 살 텐데 뭘하고 살아야 하나 하고 두번째 커리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셨고 그래서 결정한 것이 중국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셨다. 이 인상적인 할머니는 얼마나 정정하셨는지 20대인 내가 헉헉대고 오르다 만 황산 (Yellow Mountain) 을 정상까지 등반했고, 매일 저녁 학생들이 방문을 와도 지치지 않고 손님을 맞았었다. 그 분 이름은 참 걸맞게도 “작은 아씨들”의 용감한 둘째딸과 같은 조 (Jo) 였다. 평생 가르치는 직업을 해온 분인데 그분에게서는 마치 이제 처음 교편을 잡은 듯한 열정과 제자에 대한 사랑이 늘 감돌았다. 그 때문인지 문화와 나이를 초월해 만인이 따르고 존경하는 어른이기도 했다. 또한 내가 만난 사람들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분들중에 한명이기도 하다. 매년 지금까지 Valentine’s Day 에 이메일을 보내 주는 이 선생님을 기억하며, 내가 정년 퇴직의 나이를 넘었을때 내 일에 대한 열정과 고객에 대한 애정으로 행복한 할머니 변호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좋을까? 첫마음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도닦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닌가 싶다.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잊기 쉽고, 항상 노력하지 않으면 퇴색하기 싶다. 직장도 취미도 처음과 같은 열정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고 애정도 처음의 애틋한 감정을 끝까지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들 하지않는가. 그동안 살아 오면서 처음처럼 꾸준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다. 돌이켜 보면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더 많고 후회가 가득이다.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데 되풀이한 실수도 셀 수 없다. 하지만 현재를 보고 미래를 꿈꾼다. 하나 둘씩 ‘처음처럼’ 자세를 가다듬고 열심을 내는 일들을 늘려 가다 보면 어느날 조 할머니 처럼 변치 않는 열정을 가진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제 보니 내가 써온 이민 법률 칼럼이 6년을 넘어서 7년이 다 되어 간다. 이렇게 길게 쓸지 모르고 시작한 일인데 이민법이 변화가 하도 많아서인지 아니면 매년 새로운 경험을 하기 때문인지 늘 독자분들에게 전할 만한 토픽이 있었고, 칼럼을 길게 못쓸만한 특별한 위기를 겪지 않고 지내온 것이 감사하다. 칼럼을 계속 쓰는 동안 처음과 같은 자세를 잊지 않고자 옷 매무새를 바로 잡아 본다. Copyrightã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01-17 자기 희생이 봉사의 기본임을 제시하는 김기순 한미연합회
1세에서 2세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요즘 한미연합회 (KAC)LA지부는 2세들의 운영에 문제점을 내포 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 한미연합회설립과 한미장학재단의 주축 돌을 단단하게 놓았던 김기순 한미연합회(KAC)전국이사회 고문/한미장학재단(KASF)전국이사회 고문은 70세에 돌아본 미국생활50년 회고록을 내놓고 지난 시간을 회고 하고 있는 시간 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67세에 이민 와 사업을 시작한 전처를 발 듯이 분주해 지기 시작 했다. 2세들은 재정 마련에 1세들처럼 적극적이지 못 하다는 것과 1세와의 커뮤니티를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또한 이제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확실히 정하고 갈 길을 다시 고쳐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한미연합회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실질적인 운영을 2세들에게 맡기고 너무 가까이 가면 간섭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잘 흘러갈 수 있게 물고만 터주고 보아왔던 시간을 이제는 그 물결을 같이 타고 헤쳐나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김기순 고문을 만나 그가 지나온 역경의 시간들을 조명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13살 나이에 이북에서 탈출 그는 1948년에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당시13살 나이에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남쪽으로 탈출 하였다. 그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고 엄청난 일이었다고 말한다. 탈출 후 한국동란이 터지고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는데 그 당시 조그만 나무상자를 만들어 목에 걸고 캔디, 껌, 초컬릿, 담배 같은 것들을 팔았다. 문전박대 또는 매를 맞거나 물건을 뺏기는 등 수난을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이 일을 해야만이 살 수 있고 가족을 만날 수 있고 또한 부모님들을 찾지 못하면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견딘 것이 지금 그가 살아 가는데 한번 시작한 일은 참고 인내하며 끝마치는 정신력을 같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당시 김고문은 쌀10가마를 살수 있는 돈을 모았을 정도로 악착 같이 뛰었다. 그리고 학문의 줄 또한 놓지 않고 피난처에 있는 용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의 외삼촌을 피난처 집인 ‘하꼬방’에서 만나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때 미국으로 가자는 계획을 세윘단다. ‘가자 희망의 나라로’라고 결심하고 1955년에 유학시험에 응시하여, 1956년에 유학을 떠나 그 해 2월28일에 LA에 도착하여 1년 동안 편지를 써서 재정보증인을 해준 헬렌 어머니 집에 기거하며 유학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는 피난 시절 부산에서 일했던 것 처럼 중국음식점에서 접시딱기 일을 시작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일한 그 중국집이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한다. 캘폴리 포모나 주립대학에 입학 그는 학비가 안 드는 대학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들어간 것이 하버 커뮤니티 칼리지 1956년 9월부터 1년간 다닌 학교에서 국제문화의 밤도 개최하고 많은 활동을 하였다. 4년제 대학으로 가야겠다는 욕구는 공과대학 쪽으로 기울었고 또한 그 당시부터 공과대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 한때에 마침 캘폴리 포모나 주립대학에 전자 및 항공 등 첨단의 4~5개 전공과목이 있어 입학을 하게 된다. 대학생활 중 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있다. 그 당시800여명의 학생, 교수, 총장, 심지어 청소부까지 그의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오 데니 보이’ 를 영어와 한국어로 불러 사람들이 오리엔탈보이가 아이리시 노래를 부른다는 조크를 하곤 하였고 그가 졸업할 때는 가장인기 있는 학생에게 주는 ‘폴리 퍼시낼리티’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렀다. 또한 국제문화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2년 후배인 지종태씨가 태권도 유단자라 한국태권도를 선보였는데 그것이 미국땅에 최초로 태권도를 선보였던 것이다. NCR(national cash register)에서 일을 시작하다 졸업 후 시민권과 영주권이 없어 엔지니어로 취직하기가 힘들어 학교 교무처에서 일자리를 주어 5개월간 일하며 직장을 찾던 중 금전등록기를 만드는 NCR에서 연락이 왔다 군사용이 아닌 영업용 컴퓨터라 시민권 없는 사람도 괜찮다는 회사의 결정에 주니어 엔지니어로 입사 했었다. 그리고 사진과 편지로 사귀어온 지금의 아내와 교회, 유학생, 친구 등 하객이 200여명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그의 부친 고 김명한옹은 LA 김방아 하면 이 지역 이민자들은 다들 안다. 1967년에 이민 보따리를 풀면서 비즈니스를 시작하였으니 남들은 은퇴하여 쉬는 것을 어떻게 할까 하는 시간에 그의 부친은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와 한인들을 결집할까 하는 구상을 하였다. 2000년 3월 100수 잔치에는 800여명이 참석하였고 연방의회에서는 성조기를 보낼 정도로 부친의 유명세는 대단하였다. 또한 남용 재단을 설립하여 한인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었다. 부친이 올림픽가 김방아 건물위에 붙인 ‘우리는 모범 시민이 되자’ 라는 글은 20년이 넘도록 붙어 있었다. 제록스와 삼성에서 근무 김기순 고문은 NCR이 샌디에이고로 이사하는 과정에서XDS(Xerox data systems)로 입사 하여 개발한 RAD 마그네틱 헤드바와 디스크 메모리 테스트가 성공을 거두어 인센티브도 받았다. 또한 1975년부터 1999년 까지 제록스 사 의 고속 프린트 품질 확보에 공헌하였고 제품에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프로세스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여 다구치(taguchi)신뢰성 확보 기법도 도입 하였다. 그가 제록스 사에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윅과 혁신을’ 꼽을 수 있다고 하겠다. NCR에서 7년과 제록스 사에서 31년을 근무하고 나이가 63세가 되어 1999년 6월30일에 11월 말로 은퇴하고 38년의 직장 생활을 끝낸다는 감회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삼성의 끈질긴 품질향상에 대한 집념에 1999년 12월1일부터 한국에 있는 삼성전자에서 상근고문으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신념을 갖고 5년간 삼성에 근무하는 동안 품질향상과 고객만족서비스제공과정과 개발 및 생산과정을 가르치고, 시스템을 만들었고 E-PASS라는 품질관리 과정, 삼성전자제품이 세계적으로 일류가 되도록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품질과 서비스에 관한 교육과 프로세스, 기술, 기법, 기구들을 개발하여 발전토록 노력하였다. 삼성이 자기 브랜드를 가지고 세계수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사업이 번창하였을 때 힘차게 일하던 때를 생각하면 인생의 영광된 시간들 이었고 퇴임 하던 해에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여 한껏 흡족함을 느끼며 고국을 떠나 왔었다. 한인회관건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그는 한때 한인회관 건립에 전념하였었다. 문성옥, 김기순, 이화목씨를 발기인으로 한 건립위원회가 모든 기초작업을 하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건물 주인은 찰스E.로이드 변호사였는데 브래들리 시장이 LA시와 자매도시인 부산에 사절을 파견할 일이 있었는데 그 건물주인을 보내기 원했고 그 건물 주인은 그와 동행을 요구해와 흔쾌히 동행 했었다. 그리고 한국방문 시 힘이 닿는 데로 최고로 대접하였었다. 그 건물 주인은 생애처음 기억에 남는 좋은 여행이었다고 고마워 했고 건물가격에서 5만 달라나 더 깎아 주었다. 순전히 김기순 고문의 수고에 의한 가격의 다운이었다. 그리하여 1975년 우여곡절 끝에 11월22일에 지금의 한인회관이 개관 되었다. KAYF청소년 후원회와 KAC 한미청소년후원회는 1970년 한인회 사업 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1971년에는 한인회에서 독립해 한인청소년 서머 캠프로 호칭되다 1973년에 KAYF란 이름으로 연방 및 주정부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2년에 걸친 모금운동 끝에 빅베어 러닝 스프링스시에 있는 캠프코니퍼(camp conifer)를 인수 하였다. 김기순 고문은 창립멤버 이었으나 한인회관 건립을 마무리 지은 다음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1980년에 회장 1982년부터 1984년 까지는 이사장을 맡았는데 여기서 리더십 컨퍼런스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KAC 같은 단체들이 생겨 났으니 청소년 후원회는 그의 커뮤니티 활동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캠프 코니퍼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당시 그가 회장을 할 때 신청자가 너무 많아 선착순으로 끊어 마감 했을 정도 이었고 또한 캠프참가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뛰어가 얼싸안고 어깨동무하며 반가워했고 캠프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에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반갑게 만나 떠들 썩 하게 설레는 기분들 이었다. 대학생 리더십 컨퍼런스(KAC) 1970년부터 시작한 캠프가 시간이 흘러 캠프 참가자중 대학에 갔거나 갈 연령인 아이들이 많아지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그는 1980년에 회장을 맡은 뒤 대학생을 위해 캠프보다 차원을 높인 리더십 컨퍼런스를 시작하자는 의견을 이사회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오늘날 KAC가 주관하는 대학생 리더십 컨퍼런스가 되었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코리언-어메리칸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유능한 지도자를 길러내고 그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한 후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뒷바침 해주려면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유대관계가 잘 이루어 지도록 1세와 2세간의 다리역할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또한 한인 커뮤니티에서 일하며 느낀 것과 젊은 세대들에게 회의하는 법이나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부터 바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대학생을 주인으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학생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미국 내 한인1.5세, 2세, 유학생을 두루 포함시키고 남녀비율도 똑같이 하였었다. 강사들은 해당분야에서 10년 이상 경험을 갖고 있는 성공한 전문인으로 초청 하였었다. 1989년에 KAC가 인수하기전가지 캠프 코니퍼에서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이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그 당시 이슈에 대한 토론을 한 것이 모체가 되어 나중에 KAL기 추락사건이나 롤링스톤지에 한인을 왜곡하는 기사가 났을 때 항의 편지를 쓰는 등 주류사회나 언론에 한인 커뮤니티의 이해와 관련된 입장을 전달하는 움직임이 처음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이 컨퍼런스에 참가하였다가 카운슬러가 되고 디렉터가 됐던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1983년 설립 한 것이 지금의 한미연합회(KAC)다. 한미장학재단(KASF) 한미장학재단(Korean American scholarship foundation)은 1969년에 워싱턴DC에서 발족 되었고 김기순 고문에게는 1983년에 서부지역 대표이사직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 무일푼으로 시작한 서부지역은 1986년 테너 엄정행, 바이올린 이성주씨가 출연하는 모금음악회를 열고 중간휴식시간에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었다. 그 후 이사들도 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생겨나고 교포사회도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 되가는 때이라 모금만찬 등을 20년간 매년 개최하여 장학금을 모았고 이사장 직을 맡은 1991년에는 19명의 대학생들에게 각각1,000불씩, 13명의 고등학생들에게는100불식 줄 수 있었다. 2005년에 창립20주년을 맞이 하였을 때에는 기부자가 1,500여명, 수혜자는 930여명에 이르렀었다. 한인사회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 이렇듯 한인사회에서 2세들을 위해 그들이 잘 자라날수 있도록 도와주고 확실한 길을 갈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과 한인사회에 다시 그것을 환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준 것과 한인들이 미 주류사회에 제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 김기순고문이 정성 들여 키운 그들이 편지를 쓰고, 사회주요 요직에 올라선 그들이 항변 하였을 때 한인사회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시절에 캠프 코니퍼에서 즐겁게 뛰어 놀던 그들이 이제는 40,50대가 되어 주류사회에서 언어장벽 없이 그들과 똑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일하고 있다. 김기순 고문이 키운 그들을 볼 때 어느덧 그는 70이 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동안은 50을 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만 갔지 부지런한 자 에게는 세월의 흔적을 남기지 않나 보다 처음 그가 사무실로 쓰던 집 2층의 서재에는 그 당시의 역사가 담긴 모든 것이 진열되어 있다. 1956년에 유학 와 한인사회와 2세들을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김기순 한미장학재단, 한미연합회 전국이사회고문, 이제는 김방아 4째 아들이 아닌 한인과 2세들을 위해 헌신한 김기순으로 불려지길 바란다. 그는 오늘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주지한다. 정직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하라, 인간관계를 항상 원만하게 가져라 라고 하면서 2세들을 위한 사업에 골몰 하고 있다. 재외동포신문. 한국건설경제신문사. UPI통신사. 한국화보 정승덕 지사장 기사제보 문의: 408-892-1188)
2007-10-25 <미국일기> 30년 만에 얻은 트레일
30년여 미국생활 가운데 해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등산이었다. 미국에서 등산이라면 말 그대로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rock climbing)이 있고 또 하나는 도보여행이라고 부르는 하이킹(hiking)이 있다. 하이킹은 공원이나 유원지에 피크닉을 갔다가 공간에서 흔히 즐기는 여가 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등산도 하이킹도 아닌 트레일(trails)이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이다. 트레일은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도 아니고 공간을 한가하게 유유자적 걷는 운동도 또한 아니다. 트레일은 그야말로 울창한 숲 속 길을 따라 아령 같은 손 운동 기구를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다소 격렬한 경보 운동을 말한다. 필자는 토요일 아침에 보통 때보다 일찍 일어나 하이킹 정도로 생각하고 간단히 점심 샌드위치와 물을 준비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 40마일 캐스트로 밸리(Castro Valley)에 위치한 레이크 샤보트(Lake Chabot) 장소로 향해 떠났다. 레이크 샤보트는 호수 주위로 경치가 수려하고 피크닉과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 이 지역 한인교회들이 여름 야외예배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약속 장소인 공원 파킹 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한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을 만나 그의 안내로 차를 파킹하고 모임 장소에서 일찍 도착한 일행을 만났다. 대부분 생소한 분들인데 두 손을 가볍게 합장하는 것을 보고 불자들 이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샌프란시스코와 베이지역 불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산행모임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북 가주 지역에는 지역에 따라 사찰들이 나누어 법회를 갖고 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불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만나 서로 안부도 묻고 법문과 정보도 교환한다고 한다. 불자들과 산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연인의 관계처럼 보였다. 뒤늦게 스님이 도착하여 기념 사진 한 장을 찍고 12,42마일(20km)의 출발점을 향했다. 2-3 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선두 인솔자의 말을 듣고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도 주말마다 동네에서 1시간 정도 걷고 있기 때문에 2-3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먼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조금 지나자 인글로잉 네일(in growing nail)로 고생하던 엄지 발톱이 약간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등산화를 벗어 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지만 혹시 본의 아니게 일행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강행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보 중 한 일행은 베이비붐어(baby-boomer)들이 첫 미국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2040년이 되면 3명의 근로자가 1명의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최악의 연금 고갈 사태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시작한 한국은 이미 심각한 연금고갈에 시달리기 시작하여 똑같이 내고 덜 받기라는 일시적인 방법으로 현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 이 날 트레일 코스 경주 대회까지 열리어 좁은 산길은 트래픽이 있을 정도로 붐비었다. 샤보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길은 도토리 나무로 완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며 호수에는 천둥오리들이 한가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물에 평화롭고 한가한 정적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쉴 수도 없이 돌아 가는데 자연은 좀 천천히 돌아 가라는 듯 가을 오후의 햇살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 성철 큰 스님이 한신 말씀 가운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구절이 기억 난다. 자연에 인접해서 떠오른 스님의 말씀에서 또 다른 진리를 느끼게 한다. 트레일 코스의 반쯤을 지나니 벌써 시간은 낮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시장 끼가 몰려와 가져온 샌드위치를 혼자 먹을 수도 없던 중 경험 많은 일행으로부터 간단한 스낵을 받았다. 이런 코스를 한국에서 갔다면 곳곳마다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이 있어 쉽게 요기를 면할 수 있는데 미국 공원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생활의 편리함과 자연 보호의 두 마리 토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이기에 지금의 편리함 보다 자연 훼손 예방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3 시간 완주를 하고 나니 다리가 부어 오름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주신 공양 점심을 맛있게 먹고 서둘러 집에 올 수 밖에 없었다. 발바닥의 통증이 장난이 아니다. 30년을 기다린 트레일 경보는 이런 고통을 치르고 힘들게 얻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dyk47@yahoo.com 사진: 레이크 샤보트 전경 캐스트로 밸리 캘리포니아
2007-10-15 <미국일기> 월드시리즈를 기다리며
지난 1년 5개월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미 프로야구(MLB) 시즌이 끝나 간다는 아쉬움과 박진감 넘치는 내셔날 풋볼리그(NFL)가 다시 TV화면에 돌아온 것을 보니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는 계절의 변화이다. 야구가 13세기 영국에서 처음 탄생한 운동 경기지만 꽃을 활짝 핀 곳은 미국이다. 미국인이 야구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게으름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경기 진행 중에 잠시 자리를 떠나도 큰 변화를 찾기가 힘든 것이 바로 야구이다. 물론 절체절명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농구와는 달리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 되는 경기에다가 끝날 때까지 2-3 시간 이상은 충분히 잡아 먹는 경기이다. 그러다 보니 TV를 켜 놓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미국 어린이들이 초등 학교 입학을 전후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운동도 바로 야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규칙 준수와 협동심을 배우고 단체생활 적응 훈련을 하게 된다. 어린이들에게 야구장은 가장 먼저 기본적인 사회 활동을 연수하는 수련장 같은 곳이다. 어린이들이 하는 야구를 리틀리그(Little League)라고 부르는데 오래 전에 월드 리틀리그(World Little League)가 결성돼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즐기는 운동으로 크게 발전되고 있다. 야구가 아직까지 축구만큼 세계 스포츠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미국을 포함한 미주대륙 및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에서는 뜨거운 인기 구기종목으로 흥행이 대단하다. 미국 메이저리그가 10월 중에 펼치는 결승전 월드 시리즈는 전 세계로 중계돼 큰 돈을 버는 것은 물론 라스베가스 도박꾼들까지 애를 태우는 머니 메이커(Money Maker)로 오래 전에 등장했다. 미국 야구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크게 확산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원스럽게 스윙을 한다는 강한 인상과 다른 나라의 야구에 비해 홈런이 많아 관중을 매료 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야구와 관련된 마케팅은 유태인의 상술을 뺨칠 정도로 발달 되어 어린이와 어른들의 주머니를 깊이 깊이 파고 들고 있다. 더욱 특이한 사항은 세계인들로부터 미국 메이저 리그 흥행이 뉴욕 양키스(New York Yangkees)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느냐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미 프로 야구팀 중 가장 부자인 뉴욕 양키스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비싼 선수들을 모두 싹쓸이 해가는 바람에 다른 팀보다 항상 좋은 성적을 낼 수 밖에 없는 점에 분노한다. 결국 가난한 지역의 팀들은 어린 선수들을 잘 훈련시켜 키우면 양키스가 모두 돈으로 유혹하기 때문에 좋은 선수를 유지할 수도,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없다. 결국 미 프로야구도 한국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똑같이 겪고 있다. 초호화군단 양키스가 결승리그 초반에 탈락하면 미국인들은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한다. 결국 부자 구단 양키스가 패하면 자신이 부자를 이긴 것 같은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올해 양키스의 탈락은 미 프로 야구 감독 중 최고액 연봉을 받고 있는 조 토리 감독의 퇴출로 까지 이어져 대 수술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제적인 관점에서 아메리칸 팀으로 불리는 양키스의 탈락은 세계인들로부터 흥행의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 양키스가 빠진 월드시리즈는 흥행 참패를 불러 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애증의 대상인 양키스가 올해도 작년처럼 결승리그 1차전에서 클리브랜드 팀에 의해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흥행에 빨간 불이 켜졌다. 빌리언 달러(Billion Dollars) 비즈니스로 성장한 미 프로야구 팀의 올해 수지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월드시리즈에서 마저 부진하면 내년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질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뉴욕 양키스가 빠진 미 프로야구 결승리그를 구원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기 팀인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sox)가 아직 결승리그 진출에 남이 있기 때문에 수입에 변화는 적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야구팬은 월드시리즈에 어느 팀이 남느냐에 따라 결국 미 프로야구 전체가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느냐와 직결 되기 때문에 관심이 높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월드 시리즈 경기 중에 발생한 1989년 이후 한번도 월드 시리즈 경기를 개최하지 못한 이곳 자이언트 팬들에게는 올해도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해이기도 하다. 새 봄과 함께 시작한 야구가 긴 긴 뜨거운 여름을 넘어 서고 찬 바람이 감도는 늦 가을에 열리는 월드 시리즈를 기다린다는 말은 또 올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세월의 모퉁이에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사진설명: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한 조 토리 감독((67•뉴욕 양키스) Koglo 미국 샌프란시스코 특파원 김동열 dyk47@yahoo.com
2007-10-02 <미국 일기> 공항 안과 밖
추석날 오전에 아시아나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활주로에 안착했다. 바다 안쪽 베이(bay)를 끼고 있기 때문에 착륙시 새가 땅에 접하는 듯한 포근함까지 느끼게 한다. 며칠 전부터 공항에서 픽업을 하겠다던 친지를 기다리는데 친근한 얼굴이 눈에 들어 오질 안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셀룰라 폰도 없으니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비행기도 일찍 도착해서 빨리 만나면 바로 집으로 갈 수 있는데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소 황당 했지만 결국 무거운 마음을 안정 시키고 차를 잡기로 마음을 정하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르메니아 인으로 보이는 운전수와 얼굴이 부딪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그는 자기가 좋아서 웃는 것으로 이해 한 듯 여간 친절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프로 풋볼팀 49er가 벌써 2승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등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누런 이를 들어 보이면서 큰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수다를 떨었다. 며칠 전부터 당신이 나온다고 국제 전화를 하며 친절을 보여 내 주위사람들 모두에게 감동을 먹이고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은 무슨 경우인지. 불평도 몸도 자동차에 싣고 집으로 향해다. 트래픽이 죽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고속도로에서 생각보다 잘 빠졌다. 단숨에 베이 브리지 다리를 지나 버클리 대학을 지나 집에 가까이 다가섰다. 집 문 앞에 다가 서는 순간 짖는 개소리가 집에서 기르는 덤퍼(thumpper) 가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 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 자마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온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영국 여왕이 안고 다니는 개 종류라 해서 다소 점잖음도 기대했건만 그녀는 몸 전체로 나의 가슴을 세차게 쳤다. 바람맞고 들어온 사람에게 너무나 뜨겁게 덤벼들다 보니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어 났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10여 분 덤퍼와 씨름을 하고 나니 때아닌 허기가 몰려 왔다. 우선 급한 데로 물을 끌이고 라면을 찾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냉장고 설합 안쪽에 숨어 쓰러져 있는 생 우동을 찾아서 냉큼 끓이기 시작했다. 전기로 물을 끊이다 보니 서울 아파트 부엌에서 쓰는 개스 화력 생각이 절로 났다. 개스는 화력이 강해 쓰기에 좋아 보이는 한국 엄마들은 아주 싫어한다. 가스를 전기로 바꾸어 주지 않으면 바꿀 때까지 남자는 집안에서 홀로 단신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가스 냄새가 서서히 소리도 없이 엄마의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의 수명이 줄어 들면 누구에게 좋겠냐는 뜻이다. 그래서 가스 래인져를 갖고 있는 집에서 바꿀 때까지 남편들의 입지는 매우 좁다. 하여튼 우동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니 눈이 잠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란하게 전화 벨이 울렸다. 또 크레딧 카드를 내라는 불청객의 전화가 왔나. 수화기를 들고 나니 귀가에 익숙한 목소리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공항에서 돌아 오는 길인데 어떻게 된 것이냐”는 높은 톤이었다. 이거야 말로 적반하장이 아닌가? 누가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데. 누구는 실컷 기다리고 그것도 부족해 거금을 거리에 뿌리며 집에 돌아 왔는데 어떻게 된 일이라니. 나는 한 시간 이상 기다렸는데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당신은 공항 세관검사 후 나오는 문에서 눈이 빠지도록 앞만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지금 집에 있느냐고 되어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 일을 어찌하나. 나는 지난 30년 동안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픽업을 해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말했다. 당신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국제선 비행기를 어떻게 공항 밖 길가에서 기다리느냐는 소리가 나의 청각을 때렸다. 결국 당신은 신사 방법이고 나는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비싸게 파킹하고 힘들게 출구까지 한참 동안 걸어 와서 기다린 사람한데 생각 없이 말하고 난 후에 나는 부끄러워 스스로 주어 담고 싶은 생각만 떠올랐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통해 약속은 세밀히 그리고 서로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또다시 배우게 됐다. 안과 밖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내 마음을 당신의 마음으로 착각하는 자기 중심의 사고가 그 동안 소리 없이 나를 지배했던 것이다. 한국 생활 1년 5개월을 마치고 첫 발을 디딘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Koglo news 미국 샌프란시스코 김동열 특파원 dyk47@yahoo.com
2007-09-10 구본우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한국문화 샌프란시스코에 전파하는 구본우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미주지역의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지난 4월 부임해 한국문화 전파와 한국민의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구본우 총영사를 본지 인터뷰로 만났다. 미주지역 주 샌프란시스코 제21대 총영사로 부임한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출신 구본우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그는 미국의 아시아와 태평양을 향한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근무하게 된 것을 무척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그는 1978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14회 외무고시에 합격돼 같은 해 8월 외무부에서 외교관으로서 기초를 닦게 된다. 1983년 9월 유럽 행정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국립행정학원에서 1년간 수학한 뒤 1984년 7월 중서부 아프리카의 주 부르키나파소 2등 서기관, 1986년 12월 주 몬트리올 영사, 1992년 6월 주 구주공동체 1등 서기관 등을 거치면서 외교관으로서 실력과 자질을 쌓게 된다. 구 총영사는 1996년 8월 행정법무담당관, 1998년 3월 유럽통상담당팀장, 1998년 12월 주 프랑스 참사관, 2002년 12월 주 멕시코공사참사관, 2003년 12월 통상교섭본부장(도하개발아젠다 담당)을 맡아 통상업무를 맡아오다 2005년 2월 외교통상부 문화국장을 지내고 올 4월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부임했다. “우리 문화를 많이 알리렵니다” 아주 전형적인 외교통인 그는 대구 태생으로 28년 동안 외교관으로 살아왔다. 총영사관이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캘리포니아 주의 중심도시로 미국 서부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다. 구본우 총영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관용의 오아시스'로 불릴 정도로 다양성과 개방성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고 "실리콘밸리와 미국 내 'Trend Setter'로 상징되는 기업의 개척정신으로 넘치는 도시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며 "이런 곳에 위치한 공관으로서 동포 사회와 관련된 영사.동포업무 외에도 정무, 경제, 문화, 교육 등 다방면의 업무가 조화롭게 균형 잡혀 있다"고 말했다. 구 총영사는 샌프란시스코를 지난 세기 한국인의 미국 이민 관문, 해외독립운동의 주요 무대였다"면서 "한국전 당시 참전 미군이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출발한 기항지였던 점과 한미 관계에서도 중요한 무대"라고 설명했다. 이 도시는 서부지역의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SOC 기반이 구축돼 다양한 행사는 물론 인종.문화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어 한국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알리고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이해 확대와 국가 이미지를 제고 시킬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적극 활용해 한국의 문화 전파에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글 교육 지원방안 재외동포, 특히 1.5세와 2세들을 위한 한국어, 역사, 문화 등 한민족 교육지원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다각도로 노력 중이라고 말하는 구 총영사는 현재 관할 북가주, 유타, 콜로라도, 와이오밍 주에 76개의 한글학교, 약 700명의 교원을 운영 총 5,000여 명에게 한글과 한국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학교설립, 운영비지원, 교재지급, 교사훈련, 모국연수, 한국어능력시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샌프란시스코 내에 있는 릴리안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구 총영사는 앞으로 내실 있고 알찬 교육 과정이 되고 언어와 문화 등 뿌리에 대한 이해와 정체성을 겸비한 경쟁력 있는 다음 세대의 성장을 위해 계속 지원할 계획이다. 구 총영사는 이곳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은 다른 곳과는 다른 업무성격이 있다면서 동포들의 권위신장 등의 업무와 이곳이 미국 여론형성의 중심지이고 여러 주류사회 리더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영향력 있는 분야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특유의 문화공연 계획 문화공연 면에서는 지금까지 우리의 공연은 너무 전통 쪽으로만 가고 있는 것 같아 우리의 전통과 현대가 어울러져 미 주류사회에 전달되는 것이 더 유익 할 것으로 본다면서 기회가 되면 한국의 영산재, 범패소리 공연 등 그가 한국의 문화외교국장시절에 이끌었던 인맥과 문화행사를 이곳에 접목시키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올 10월께 이곳 동포와 미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매번 같기만 하던 한국의 문화행사가 문화외교출신의 구 총영사 덕분에 신나고 감명 깊은 한국의 문화를 접하게 될 것 같다. 한국 문화 공연을 준비하는 등 보다 알차게 알리는 문화 전도사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외교관생활 중에서 국제박람회기구 BIE(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에서 한국대표로 4년간 일하면서 위원자격으로 부의장까지 올라갔던 시절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동포사회 발전 위해 지속적 노력 끝으로 구 총영사는 10만 이상의 동포사회를 가진 북가주, 그리고 콜로라도, 유타, 와이오밍 등 관할지역의 동포사회의 조언을 수용하면서 한미관계 발전을 위한 헌신하겠다는 게 구본우 총영사의 생각이다. 또한 긍정적 여론 조성, FTA, VWP등 한미간 주요과제의 원만한 추진을 위한 정책홍보 등의 측면지원 노력과 함께 우리나라 경제정책, 투자환경을 적극 홍보하는 한편 KOTRA, KIICA, KIN 등 유관기관과 함께 실리콘밸리와 한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형성에 노력하겠다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글/사진 정승덕 미주지사장
2007-09-08 LA 민화협회장 박상준
미주동포 화합에 앞장선 박상준 대표 윌셔 제이박 종합보험社 성공적 운영 미주지역으로 이민해 이민족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종합보험사를 운영하는 박상준(제이박 종합보험사) 대표는 화합하는 이민 사회를 이끌어 동포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박상준(제이박)대표는 1974년 한국의 인천을 떠나왔다. 박 대표는 그 해 인천고를 졸업하고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난 그는 그 곳에서 다시 고등학교를 다녀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2년 뒤 미국으로 오게 된다. 그는 1976년부터 2000년까지 그가 미국 땅에서 생활 수 있는 공부와 준비를 하게 된다. 그 중 특이한 것은 그가 서반어과 학사를 취득하고 LA Mirada Jr.school과 west Covina중학교에서 약 3년간 서반어과 교사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미국 캘리포니아 특히 LA지역에 살고 있는 그에게는 더 없는 힘이 되고 있다. 현재 박 대표는 LA에서 비즈니스로는 윌셔 제이박 종합보험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고객은 75%가 히스패닉이다. 25%가 한인과 기타 민족이니 그의 서반어 실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들에게 쏟아 부은 정열 또한 남다르다. 박 대표의 사무실 한 곳은 한인지역에, 4곳의 사무실은 히스패닉 지역에 있다. 그들이 한국인 줄 알고 접근할 수 있는 뭔가를 찾는데 언어까지 시원스럽게 통하니 고객이 더욱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제 박 대표가 LA한인행사에 모습이 안보이면 이상할 정도이다. 이민생활과 학창시절을 그와 같이 보낸 동기들도 "그 사람 괞찮아요."하며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많다. 그는 월드컵이 유치되기 전 1998년부터 2001년에는 2002월드컵 유치 미주본부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한인 사회에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하는 일이 무척 많다. 대부분의 한인 사회에서 감투만 쓰고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박 대표는 손수 솔선하여 실질적으로 움직이며 알을 찾아 하고 있는 동포사회 큰 일꾼이다. 또한 그는 미주한인보험인협회 창립 초창기부터 참여해 이사, 이사장,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이 협회가 우뚝 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사무처장 시절인 1992년 LA 4.29폭동으로 어수선할 당시 보험인의 중요성은 물론 협회를 홍보 하는데 주력했다. 또 1995년 1월에 진도 8.5의 노스리지 강진 후속대책 보험협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진보험 및 사후 클레임 방법을 놓고 지진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지진을 당한 다수의 동포들에게 직접적인 수혜의 받도록 하는가 하면 위로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박 대표는 또한 회장 재임 시에는 생명보험과 상해보험대리인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forum를 개최하여 보험인의 권익향상에 기여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고국의 법무부와 연결하여 각종 손해 보험사들과 교환 방문을 실현하는 일도 해냈으며, 주류보험시장의 공략을 위한 1.5세대나 2세대들에게 취업박람회를 열어 한인 보험인들이 주류사회에 진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미주지역 라이온스클럽 활동 돋보여 박상준 대표는 로스앤젤리스의 4 L 3지역의 라이온스클럽에 활동하면서 선구자라이온스클럽 14대, 19대 회장을 역임하고 지역본부에 진출하여 지역위원장, 국제위원장과 지역부총재를 역임했다. 그는 지금 2008년에 선출하는 라이온스클럽 전 지역 부총재에 출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직책으로서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소외된 계층은 물론 동포사회 구석구석을 찾아 봉사하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 결과 2000년 6월에 국제라이온스가 인정하는 숨은 봉사자에게 수여한 최고의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매년 5~10명의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생을 선발하여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박상준 대표는 미주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이사와 2002월드컵 유치 범국민운동본부 미주사무총장, 이북5도민협회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또 함경도 도민회 이사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11기, 12기 위원으로서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한 인식과 미주사회에 한반도의 평화통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주평통 12기에서는 LA협의회 간사를 맡아 실질적으로 민주평통의 살림을 운영해 왔다. 민족 화해협력 미주한인회 결성 나서 지난 3월에는 미주지역에 민족 화해협력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민족 화해협력 미주한인협의회(이하 민화협)을 창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박 대표는 협회의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돼 실질적인 대표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박 대표는 "민족 화해협의회는 몸이 아닌 마음으로 움직이는 민간기구"라며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단체로 민간 차원의 민족 화해협력운동이 되도록 많은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화협은 1998년 고국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합의 도출과 민족의 화해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이루기 위해 출범하였다. 박 대표는 민화협서부지회가 앞으로 미주 한인사회에 맞는 통일상을 정립하는데 일조를 기하겠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 LA 남단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우정의 종'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정부가 기증한 것이다. 미 동포들의 망향의 한을 다스릴 수 있는 유산으로 뿌리내린 지가 이미 오래다. 그러나 동포들의 행사에 종은 치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보존하는 데는 모두가 소홀히 하는 것을 늘 애석하게 생각한 박 대표는 지난해 '우정의 종'의 보존을 위해 뜻있는 사람들과 우정의 종 보존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앞으로 우리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동포사회는 물론 주류사회에 까지 알린다는 목적으로 위원회를 창립하고, 그 지역인 샌페드로로시 의원과 실무적인 협의를 통해 한국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박상준 대표는 조국을 걱정하고 민족을 아끼는 면이 남다르다. 그가 뛰어다니는 일들이 봉사활동에서 출발한다. 그 시간에 보험업을 하기 위해 그렇게 뛰어 다녔으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교포사회와 한민족의 화합을 앞세웠다. 누구나 사업을 하다보면 우선 눈앞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은 수 없다. 그러나 박 대표는 자신의 작은 이익 보다는 교포사회의 화합과 단결만이 주류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먼 안목으로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박상준 대표의 이 같은 교포사회의 봉사는 많은 한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고 더 큰일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는 아마도 다가오는 2008년 라이온스클럽 부총재에 선출돼 분명 새로운 모습의 라이온스클럽을 만들고 더 많은 봉사활동을 펼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사진 정승덕 미주지사장
2007-08-17 휴스톤에 거주하는 재미동포가 만해대상을 수상
지난 12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린 입재식과 만해대상 시상식에는 김종민 문화관광부 장관과 김진선 강원도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총재 지관 스님(조계종 총무원장)은 입재식에서“만해축전이 그 많은 축재 중에 으뜸인 것은 중생의 그리움을 구현하는 은유와 서사의 탁월한 방편을 찬미하는 축제이기 때문이며, 만해(萬海)가 그 이름 그대로 불교나 민족의 지류를 넘어 세계인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3.1 독립운동 33인 가운데 한 분이고 ‘님의 침묵’으로 널리 알려진 만해 한용운 선생의 얼을 기리는 제9회 만해축전은 지난11-13일까지 백담사 계곡에서 펼쳐졌다. 이번 만해대상 올해 수상자는 엘 하지 오마르 봉고 온딤바 가봉공화국 대통령(평화), 김남조 시인(문학),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학술), 루이스 랭카스터 전 버클리대 교수(포교), 비시루 니스투리 네이팔기자연맹 회장(실천), 서인혁 세계국술원 총재(특별)가 상을 받았다. 미국 휴스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서인혁 총재(68)는 그 동안 한국 전통무술을 발전시켜 오늘날 미국에서 3대 무술 중 하나로 자리잡게 하고 나아가서 세계 30여 나라에 700여 도장과 15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 공로를 인정 받아 특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총재는 수상소감에서 “이 상(賞)은 만해선사의 큰 선물이자 더욱 힘쓰라는 채찍질로 여겨집니다. 과연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직도 의문이 남습니다. 세계 최고의 무술을 만들고자 고국을 떠나 온것이 불교와 만해 사상을 온 천하에 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질긴 인연처럼 새롭게 와 닿습니다”며“앞으로도 한국의 전통무술 국술을 전세계에 보급하면서 고귀한 만해 사상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재미동포로서 처음으로 만해대상을 수상한 서인혁총재는 영산대학교 생활스포츠학부 동양무예학과의 석좌교수로 2005년에 임용되었으며, 년 12개 토너먼트와 48개 승단대회를 직접 관장하고 있다. 국술원은 1958년 부산에서 창립 되었으며 1975년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세계국술협회가 창설되어 발전하는 기반을 구축했다. 1991년 세계국술협회를 텍사스 휴스톤으로 확장 이전하고 미 육군사관학교의 요청에 의하여 국술이 정식 체육종목으로 채택 되었으며, 1998년 서총재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 받았다. 2001년 대구에 사단법인 국술원을 창립하여 영국협회와 함께 미국, 영국, 한국 등 3개 본부 및 지역 협회가 활동하고 있다. 서총재는 “내년 국술원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휴스톤에 21에이커에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5에이커 크기 세계국술본부(20275 FM-2920 Tomball TX 77375) 체육관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총재는 샌프란시스코의 올드 타이머로 16년 동안 거주했으며 아직도 베이지역 동포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 계곡에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만해축전 기간에 열리는 만해대상은 그 동안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달라이 라마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잉카 시인 등 세계적인 인물들을 수상자로 배출했으며 한국내에서도 고 강원용 목사와 함세웅 신부 등 타종교인도 수상자로 배출했다. 수상자는 상금 3천만원(외국인 3만 달러)이 주어진다. (김동열 객원기자/서울에서) 사진설명1: 서인혁 세계국술원 총재가 특별부분 수상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사진설명2: 12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린 만해대상 시상식에서 수상자인 엘 하지 오마르 봉고 온딤바 가봉 공화국 대통령, 김남조시인,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 루이스 랭카스터 전 미국 버클리대 교수, 비시누니스투리 네팔기자연맹 회장, 서인혁 세계국술원 총재(왼쪽부터)가 대상을 앞에 놓고 포즈를 취했다.
2007-07-05 샌프란시스코의 여름 바람
언제나 애기처럼 느껴졌던 작은 아이의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지난 6월 중순 서울을 출국했다. 아침 주일예배 후 서울 삼성동 공항타워에서 짐을 붙이고 코엑스 후드 코트(Food Court)에서 비빕밥을 간단히 먹고 들뜬 마음으로 대한항공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침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 출발과 똑 같은 시간에 마중을 나가는 친지를 공항 터미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루함도 잊어 버린 채 출국 수속을 마치고 아시아나에 탑승했다. 10시간 비행 후 하늘에서 본 샌프란시스코는 각각 다른 형상의 건물 색깔과 푸른 베이(만)가 만나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점점 가까이 들어왔다. 하늘에서 본 샌프란시스코가 왜 세계 3대 미항중에 하나로 평가 됐는지 그 이유를 알게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띠엄 띠엄 구름과 일찍 밀려온 안개에 적지 않게 가려졌지만 맑고 푸른 하늘과 어울려 거리에 처음 나온 수줍은 여인처럼 보일 듯 말 듯 아름다움과 청아한 품위를 도도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차를 기다리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다. 순간에 불어온 바람은 나의 폐부를 완전히 청소하듯 몸 속에 깊이 깊이 들어가 고향 사람의 도착을 소리 없이 환영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여름 바람은 서울에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축복 받은 이 지역 사람들만을 위한 특혜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 여름 바람은 먼 북극 알라스카에서 시작한다. 알라스카 만에서 시작되는 여름 계절풍은 미서부 연안을 따라 바다의 도시 시애틀이 위치한 워싱턴 주 해안을 지나 오레곤 해안을 거쳐 북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서 케스케이드 산맥에 막혀 멈추어진다. 이 서북미 태평양연안을 따라 부는 계절풍으로 연안 해수가 회전운동을 일으켜 표면해수가 심해로 이동되고 태평양 심해의 차가운 해수가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냉기류가 연안으로 이동하여 하절기 서북미지역기온이 계절풍이 심하게 불때면 초가을의 날씨를 몰고오는 현상을 흔히 볼수가있다. 여름철 해수 표면온도가 화씨 36도 미만까지 되는 때가 있어서 샌프란시스코 베이(만) 중앙에 위치한 알 카트라스 형무소에서 요행히 탈출해도 찬 바닷물 때문에 물속에서 얼어 죽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도 생겼다. 하여튼 그 얼음 물이 흘러 내려 오면서 찬 바람을 일으키고 태평양 공기와 결합해 독특한 안개 권을 형성 한다. 미국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힘든 샌프란시스코만의 독특한 기후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 저녁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를 안개 때문에 무더운 여름에도 두터운 잠바를 차에 넣고 다녀야 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반전, 반체제 작가로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미국 제일의 독설가이자 위대한 애처가답게 자신이 보낸 가장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이 전해진 다음부터 샌프란시스코의 여름 밤은 관광객들에게 공포의 시베리아 밤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바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사계절이 있다. 6월부터 시작되는 여름에는 화씨 90-100도까지 오르지만 실로 변화 무쌍하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항상 날씨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의 경우 두툼한 옷 준비가 없을 경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여름날 오후에 접어 들면서 갑자기 짙은 안개가 밀려 오면서 돌변하면 초 겨울처럼 추운 날씨로 변한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따가운 햋살을 즐기며 케이블 카(노면전차)에 매달려 가던 관광객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시간이다. 이처럼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흡사 어린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마음처럼 예측할 수가 없다. 한 여름에도 반 바지와 두터운 코트가 함께 불평 없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특징이다. 이런 바람과 안개를 더욱 만끽하려는 사람들은 자주 금문교를 찾는다.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꼭 가야 하는 명소로 사랑을 받는 곳이지만 다리를 둘러싸고 있는 프리시디오(Presidio) 언덕과 날씨는 마음이 선한 사람에게는 매우 따듯하고 후한 날씨를 선사하지만 자녀를 괴롭힌 사람에게는 몹시도 나쁜 날씨로 변하여 음산한 겨울 바람과 함께 안개 비를 뿌려 대신 갚아 준다. 또한 세계의 명물 피라미드 빌딩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 전경도 보여주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름에서 보듯 ‘프란시스코’란 성자의 이름을 붙일 만큼 종교 색갈이 진한 다 문화 항구 도시였는데 60년대 월남전이 시작 되면서 반전과 진보의 도시로 크게 변모했다. 전통적 기성세대에 반대하고, 기존의 질서에 대한 개혁과 사회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시민 정신의 물결이 버클리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 났다. 그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공원 주변 애쉬비 거리를 중심으로 히피(Hippie)족이 탄생하고 스캇 멕켄지가 불러 우리의 감성을 움켜 주었던 노래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머리에 꽃을……’도 이 때부터 널리 퍼졌다. 그러나 진짜 혁명적인 변화는 천당 아래 구백구십구당(999당)으로 불릴 만큼 천혜의 자연 조건을 구비한 샌프란시스코가 게이(동성애자)들의 메카로 변했다는 우울한 현실이었다. 성경에서나 잠시 비쳐진 일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미국은 물론 세계는 다시 한번 아름다운 항구 샌프란시스코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주목하게 되었다. 게이들의 해방구처럼 알려진 샌프란시스코로 분노한 게이들이 모이고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 중심으로 자리가 잡히면서 샌프란시스코는 엄청난 성 문화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동안 게이 정치인도 탄생하고 정치적 암살 사건의 난마 속에서 게이들은 엄청난 고난과 차별을 받으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스스로의 목소리를 높이고 권익을 성장시켜 왔다. 이제는 사회가 그 들의 존재를 완전히 공인 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아직도 종교계의 극심한 반대와 보수파의 반발로 인권 대립은 계속 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특별한 여름 바람은 깊은 잠에 빠지지 않고 항상 깨어 있도록 이 지역 사람들을 긴장 시켜 왔고 새 질서의 형성을 추구하는 기업적 창의력을 일으키게 했다. 그런 바람이 스탠포드 대학과 함께 실리콘 밸리의 기적을 만들고 미국의 IT지식사회를 개척해 왔다고 샌프란시스칸(샌프란시스코 사람들)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가장 지적 순위가 높은 도시 중 시애틀과 함께 최상위권에 머무르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창의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6개월 만에 나를 반겨준 여름 바람과 언제 다시 만날까?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dyk47@yahoo.com)
2007-05-03 재벌총수의 폭력
서울의 분위기는 안팎으로 무척이나 뜨겁다. 봄 벚꽃이 떨어지자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상 고온이 시작됐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너무 커 겉옷은 빠트리지 않고 다녀야 한다. 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는 재벌총수의 폭력이다. 서울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이들이나 하는 주먹질을 대 재벌 총수가 그것도 술집에서 아들의 시비에 끼어들어 조폭들의 싸움을 방불케 하는 추태를 부렸다는 것이다. 매 맞은 아들 때문에 불거진 폭력은 3流 연속극에나 나오는 단막극에 비유되고 있다. 술집에 가면 이런 저런 사소한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총수가 그런 일에 탈법적인 방법으로 경비원을 무더기로 동원하여 싸움 당사자도 아닌 술집 종업원을 무차별 구타한 후 말썽이 날 것 같으니까 그 다음에는 돈으로 입을 막는 매수까지 하려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야말로 가진 者가 만인에게 볼 테면 보라는 식의 추잡스러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총수의 폭력과 매수보다 이 사건을 첩보한 경찰의 묵인이 더욱 웃긴다. 부패한 중국 같은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지 1달 이상 내사를 한다며 재벌의 눈치를 살피면서 미적 미적하고 있다가 신문이 진상을 폭로하고 청와대의 추궁이 뒤따르자 떠밀려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했다. 그 동안 이유도 모르고 재벌총수와 그가 데려온 경비원들에게 무조건 집단 폭행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곳으로 끌려 가서 또 마구 얻어 맞은 술집 종업원 피해자들의 인권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더욱 촌극 같은 이야기는 아들을 때린 사람을 뒤늦게 잡아서 무릎을 꿀게 한 다음 총수가 때리려 하자 매맞은 아들이 말렸다는 뒷이야기의 진위도 궁금하다. 그리고 총수가 지켜보고 아들은 자신이 맞은 만큼 때려 매맞은 빚을 갚았다는 것이다. 이번 충격적인 보복폭력 사건을 보는 서울 시민들은 재벌 식 부모의 사랑이 이런 식으로 표현 돼서야 되겠냐는 분노와 돈 있고 힘있는 사람이 무고한 사람을 마음대로 감금하고 마구 때렸는데 경찰이 수사도 하지 않은 늑장대응에 분통을 터뜨렸다. 有錢無罪, 無錢有罪가 꼭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비뚤어진 한국 특권층의 지속적인 반칙 플레이를 이번에는 단단히 뜯어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은 재벌의 도덕적 한계를 보여준 이번 폭력사태에 실망이 크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재벌총수의 사상 초유 폭행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나쁜 죄질과 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여론 감지되고 있어 경찰과 검찰이 어떤 방법으로든 재벌총수를 손보려고 한다. 적지 않은 식솔을 거느린 재벌 총수가 폭력 사건으로 구속 영장이 신청 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 흔한 재벌 가의 비자금 횡령이나 연예인 스캔들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재벌회사 직원들의 수치심이 모두를 허탈하게 만든다. 지난 1년 동안 한국 체류 중 동포의 눈에 비쳐진 한국 내 가진 者의 당당한 교만과 없는 者의 배고픈 허기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흔한 예로 조금 있다는 사람은 아침에 호텔에 가서 한 잔에 15,000원(16달러)상당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고 점심은 20,000원(22달러) sea food 부폐를 먹고 저녁에는 정식 최저 30,000원(32달러)에서 시작하는 식사를 먹는다. 식후에는 소화도 할 겸 밤 문화를 즐기려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사용하면 20,000원(22달러), 마지막 코스인 술집에 가면 머리당 약 200,000원(215달러)정도가 필요하다. 밤 12시가 지나면 집으로 가야 하는데 음주 운전하다 걸리면 문제가 복잡하니 또 20,000원(22달러)를 주고 대리운전기사를 불러야 한다. 이 사람은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 할 때까지 하루 동안 쓴 용돈이 약305,000원(329달러)이다. 먹고 산다는 사람들의 하루 가계부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런 생활을 365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쓰는 하루 용돈은 정부로부터 받는 기초생활 보호자 한달 생활비와 거의 맞먹는 금액이다. 기초생활자가 약 30만원을 받을 경우 보통 월세로 10만원, 공과금으로 7-8만원, 약값이 5-6만원, 나머지 6-7만원이 식대로 쓰인다. 결국 한달 동안 라면 아니면 연명할 수 없는 돈이지만 그래도 불쌍하게 생각하는 동네 사람들이 챙겨 주는 음식과 밑반찬으로 근근이 살아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재벌총수는 하루 저녁 소란으로 매맞은 사람들을 입 막기 위해 수많은 돈을 사용하려 했다는 증언이 주변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에 관련돼 경찰의 강도 높은 취조를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약관 30살이 되기도 전에 대 그룹의 총수가 됐다. 나이가 젊은 때는 외화 밀반출로 말썽을 일으킨 적도 있고 형제간의 재산싸움으로 꼴불견을 보여준 적도 있다. 그러나 通이 크고 의리경영으로 오늘 그의 재산은 물려 받을 당시의 재산보다 20배 이상으로 늘려 성공한 재벌 2세로 주목을 받아 차세대 한국 경제를 이끌 어 갈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주목 받기도 했다. 그는 올해를 변화의 元年 으로 선포하고 과거의 불상사에서 벗어나기를 願했다. 아울러 변화의 새 출발을 전 직원에게 강조하고 外적으로는 막대한 돈을 들여 3개의 타원으로 그려진 새로운 이미지 제고 로고를 신문과 TV에 광고도 했다. 그러나 술집 폭력 극으로 자신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만인에게 무일푼으로 광고한 셈이다. 改過遷善은 인간 누구에게나 힘든 모양이다. 재벌을 건드리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유감없이 보여준 총수도 지금쯤은 후회할까? 아직도 매맞은 자신의 아들만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할까? 재벌총수의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서부활극은 조승희 사건과 한나라당의 참패까지 잊게 하는 초여름의 길목을 뜨겁게 장식하고 있다. (서울에서 김동열 dyk47@yahoo.com) 사진설명: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2007-04-26 버지니아의 비극
졸업을 앞둔 작은 아이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버지니아 공과 대학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뉴스를 접한 부모로서는 자식의 소식이 몹시 기다려졌다.전화를 할까, 아니면 이 메일을 보낼까 여러 생각을 하던 중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그 학생과 비슷한 나이였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한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지 신경이 쓰였다. 사건 내용을 알고 있느냐는 물음과 함께 범인은 한국인이기에 앞서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꼭 받아야만 했던 불행한 정신병자(sick man)로 생각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캠퍼스에서 만난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한국인과는 무관하게 생각하니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도 전해 왔다. 걱정은 줄었지만 아이의 말처럼 한 개인의 일이라는 말에 선뜻 동의 할 수가 없다. 범인의 오리진이 한국인이고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어떻게 교포의 한 사람으로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부에선 이런 자책을 한국적 감수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국민과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애도의 뜻을 표한 것은 이번 사건 수습의 올바른 반향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픔을 치유하는 첫 단추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일부 한국언론은 범인이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기 쉬운 1.5세 였기에 일어난 사건처럼 이야기하는데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1.5세들 중 성공한 한국계 젊은이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 그렇게 많은 숫자를 보더라도 그런 논리는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부모가 영어를 못해서 1.5세나 2세들이 괴로워하고, 필요한 교육을 받지 못해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진단도 맞지 않다. 조군의 부모는 보통 한국 이민자들처럼 성실히 일하고 열심히 자녀들 뒷바라지 하여 좋은 대학에 보낸 잘못 밖에 없다. 누가 감히 이런 부모에게 교육 부재 운운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죄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70년대, 80년대 미국에 이민을 와서 고생을 하지 않은 1세 가정을 찾기가 쉽지 않다. 부부가 함께 집을 꾸려갈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미국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양부모가 맞벌이하지 않고 가계를 꾸려 간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일부 자녀 교육이 희생 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한국언론의 말대로 양 부모가 일하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고 그것이 이번 사건의 일부 원인이 되었다는 말에 말문이 막힌다. 한국도 맞벌이 부부가 늘어 나면서 이민 가서 어쩔 수 없이 어려웠던 교포들 가정에 대한 이해도 많아질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 한국 정부의 대응은 매우 적절했다. 노대통령의 애도 메시지며, 정부 대표자의 초기 대응도 좋았다. 주미대사의 어처구니 없는 32일 단식 주장을 제외 한다면. 일부에선 한국 정부의 애도 표시가 다 인종 국가인 미국에 너무나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냐, 책임을 과도하게 떠맡는 거 아니냐는 시비가 일부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 대통령의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는 애도 메시지는 무고한 희생자와 부상자 가족이 감동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국 국민과 재미 교포들이 보여준 진정한 위로도 양국민의 갈등을 예방하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사건 후 버지니아 공과대학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 부상자를 포함한 다수의 한국 학생들이 떳떳이 참여함으로써 미 국민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동반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부 미 국민들은 이제 분노와 슬픔은 뒤로 돌리고 모두 한마음으로 미국인의 마음을 치유하면서 전진할 용기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미 국민들이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선 재미동포 사회가 합심하여 하나된 마음으로 미 국민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도 미주 교포사회의 능력을 믿고 미 국민들과 유족 및 부상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할 만큼 했으니 뒤로 물러나고 이 후의 모든 치유과정은 교포사회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 미국 사회에 익숙한 동포사회 및 종교 기관 성직자들이 나와서 미 국민의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이런 사건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나눈다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총기판매 제한 또는 구매 심사 강화 법안 캠페인 등으로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국 사회에 일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조급히 서두르지 말고 미국 각 지역에서 지역 형편에 알맞은 방법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자연스럽고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교포들간의 따뜻한 위로도 절대 잊지 말자. 이민 역사가 아직도 미천한 재미 동포 사회에 버지니아의 비극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크고 어려운 사건이지만 이런 고통을 통하여 동포사회를, 그리고 각 가정을, 자녀들을 다시 정리하는 좋은 기회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 접한 많은 해외동포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럽의 교포들 가운데는 재미동포들이 이런 일로 기죽지 말아야 한다는 격려도 있었지만 그런 말속에는 자승자박이라는 반미 감정이 생각보다 많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 국민들을 위한 애도와 위로가 우선되야할 시점으로 생각된다. 과거 유나보머라는 사람을 기억 하는지… 버클리 대학의 천재 수학교수였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기계 사회를 증오해 사제 우편 폭탄을 만들어 많은 희생자를 낸 엽기사건이었다. 범인 조승희도 유나보머처럼 세상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증오했던 것이다. 그는 계획적 사고임을 증명하는 동영상까지 방송국에 보내는 더 악질적인 면도 보였다. 아울러 학교 총기사고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 낸 치욕적인 신 기록을 남겼다. 재미 동포사회가 그 동안 미 주류 사회에 쌓은 신뢰가 이번 사건으로 무너졌지만 오늘부터 다시 하나의 벽돌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 미국 국민들은 국적과 범죄에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기에 특별히 사건 후휴증이 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확실히 슬픈 날이다. 또한 한국 국민이 바라보는 재미교포들에 대한 시선도 사건만큼이나 매우 따갑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무고한 희생자들이여! 고통 없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안식을 얻으소서…… (서울에서, dyk47@yahoo.com) 사진설명: 버지니아 공과대학 풋볼경기장에서 열린 추모식 광경
2007-03-22 이민자의 숨겨진 고민
꽃샘 추위도 계절에는 어쩔 수 없는 듯 서울은 따뜻한 봄 날씨에 완연히 접어 들었다.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거주하는 K형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필자가 지난해 초에 만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랜만이고 의외로 서울에 까지 전화를 하였으니 무슨 급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머리가 다소 어수선 했지만 하여튼 반가웠다. 성격이 급한 그는 용건부터 말했다. 내용인즉 조금 있으면 은퇴 하는데 미국 생활이 너무나 단순해 뒤늦게라도 한국에 돌아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하도 진지하고 굳어져 선뜻 대답 하기가 힘들었다.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그의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있는가? 하나의 지인으로 한다면 그에게 어떤 진솔한 답을 해야 할 것인가? 잠시 머뭄거리니 그도 필자의 난처한 입장을 이해하는 듯 답답한 마음에서 조언을 듣고 싶다며 낮은 톤으로 다시 이어 갔다. 은퇴를 앞 두었어도 그의 수명은 적어도 20년 이상은 더할 것이다. 그러면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그는 미국에서 오래 동안 장사를 했으니 한국에 돌아 가서 조그만 한 구멍가게라도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럼 지금 하고 있는 가게보다 더 작은 구멍가게를 하기 위해 한국에 나오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다. 가게는 호구지책의 대안이고 한국이라는 다이나믹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함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 동안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의지가 담기지 않은 생활을 하였는지 짐작이 갔다. 또한 은퇴를 앞두고 있는 분으로 부터 그런 활기찬 이야기를 들으니, 그 또래 선배님들이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에 존경심이, 나 자신에겐 정체된 사고가 재삼 부끄러웠다. 잠시 후 필자는 한국 생활 가운데 몇 가지 힘든 부분을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이하 S.F)에서 살면서 소중히 쌓은 크레딧과 따듯한 인간 관계를 모두 접고 한시적이지만 또다시 30년 전 초기로 돌아 가 새 출발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 더욱 어려운 것은 한국 사람과 편안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과 그들과 우리는 피부색은 같으나 이젠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의 이야기를 듣던 그 분은 안개 같은 귀환의 본능에서 현실의 찬 공기에 실타래처럼 흩어진 감정을 되찾는 듯 머뭇거리며 산만해진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반복 되는 단조로운 이민생활에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안 느껴 본 이민자가 어디 있겠나. 샌프란시스코를 10년 전에 방문했던 사람들이 와서 본 후 공통점은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한인 업소들이 그런대로 산재한 재팬타운과 기어리 거리는 거의 그대로 라고 한다. 2-3년 전 기어리 끝 바닷가에 위치한 클리프 하우스(Cliff House)가 리모델을 했다는 정도이다. 그 분이 답답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이해하지만 미국이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살고 있는 보통사람 동포들의 생활이 비슷비슷 하다. 올림픽을 앞둔 중국이나 중동의 기적을 연출하고 있는 두바이 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개발 도상국을 제외하면 큰 외적인 변화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외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살고 있는 현지 사회에 동화된 새로운 문화 창조와 자신의 다양한 문화 중심 생활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거주지 중심의 이민문화를 더 없이 강조했던 것이다. 이민자 1세들에게 현재의 거주지는 바로 삶의 터전이고 행복한 생활의 종착역이라는 확고한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필자가 지난 25년여 S.F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동포들의 저조한 행사 참여 의식이다. 매주마다 적지 않게 투자된 문화 행사와 종교행사 및 이벤트가 열리는데 대부분 동포들의 관심 밖에서 썰렁하게 진행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거주 지역에서 전통 문화를 세우기 위해선 동포들의 적극적인 동력과 확고한 참여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내에서 열리는 행사 중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공연과 전시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좋은 행사에 참석 하려는 노력과, 즐기려는 욕망이 부족하면 결국은 공허한 이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K형에게 어떻게 소일 하느냐고 물으니 낮에는 일하고 집에 오면 한국 비디오 보고 주일에는 교회에 간다고 한다. 스스로 고립되고 단조로운 3박자 울타리를 친 그가 희망처럼 역동적인 한국에 와서 적응 하기가 쉽겠는가? 필자로부터 속 시원한 대답을 원했던 그는 스스로가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아쉬움이 많이 남은 듯 전화를 끊지 못했다. 아직도 시스템에 의해 사회가 돌아 가지 않고, 어설픈 민족주의 배타성에 모든 해외 동포를 중국의 조선족 정도로 착각하고 체류 동포가 온라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극장표 하나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차별된 거소증(해외 동포용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한국 정부의 동포 정책이 변화 되지 않는 한 한국 사회가 재외 동포들의 상식적 역 이민을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은 필자의 확실한 대답이다. 이민 100년을 넘은 동포사회가 아직도 성숙된 동포 문화를 형성하지 못해 은퇴 후 무료한 생활이 두려워 이민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아쉬움이 너무 크다. 자신의 청춘을 바쳐 살던 곳을 떠나 K형처럼 막연히 고향으로 돌아 가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결정이 아닐까. K형의 열망이 어쩌면 해외에 살고 있는 이민 1세들의 숨겨진 고민일지도. (서울에서 dyk47@yahoo.com) 사진설명: 남대문 거리를 꽉 메운 서울의 자동차 홍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