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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01 ] [이원창 컬럼] 힐러리, 여자 나이 65 세

"어떻게 해서 4명 씩이나 죽도록 내버려두었나?" ... "우리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최선은 무슨 최선, 공격을 당하기 며칠 전부터 계속 지원요청이 있지않았나?"
"자세한 내용은 보고 받지 못해서 잘 몰랐었다."
"감추려하지 말라. 이건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야, 당신의 실수로 죽은거야- -당신을 Fire 시켰었어야지"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내 잘못이다"
이미 4 명의 목숨은 잃었다. 일단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당시, 어떤 상황에서 당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거리로 나갔다가 당했는지 , 아니면 테러리스트들이 덮쳐서 죽였는지.
이것을 놓고 지금 이 얘기, 저 얘기 꺼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사건 수습 후,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서 논의해야 하는것이
지금으로서는 더 급선무가 아닌가?"....

힐러리 클린턴 제67대 미 국무장관.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두 공화당 의원들과 격론을 벌였다.
장장 5 시간이나.
바로 며칠전 머리에 생긴 가벼운 뇌진탕으로 쉬고 있다가
청문회에 출두, 벼르고 있던 공화당 의원 들로부터
지난 9월 [리비아 밴가지 주재 4명의 대사 포함 미 외교관의 살인 사건]에 대한 집중 공격을 받았다.
공화당 의원들의 집중포화는 포연만 날린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좐 매케인을 포함 공화당 대부들을 , 그녀 홀로 맞서 대적한 것이다.
그것도 이제 그만, 며칠 지나면 장관직에서 물러난다. 자의로.

1947 년 10 월 시카고 출생.
돌아보면, 참 열심히도 살았다. 고난도 많았고....
부유한 집,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 그리고 흑인들도 많이 도왔고
또한 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물론, 오바마와 한 판 붙었을 때는 다 자기 핏줄을 찾아갔지만..
"후회는 없다."
왜?
"나는 후회를 모르니까(?)"...

웨슬리 대학교 개교이래 처음으로 외부인사를 제치고 재학생 중에서
졸업연사를 맡았고, 그 과감한 내용에 매이져 신문들은 찬사를 보냈었다.
졸업 후, 그녀는 알래스카로 직행 캔 공장에 취직 생선을 짜르다가
열악한 작업환경에 분노, 업주를 고발했고, 이에 맞선 업주는
공장문을 닫아버렸다.

1970년 예일 법대로 진학, 같은 클래스에서 빌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운명적인 둘의 만남!
힐러리가 방학동안에 오클랜드의 로-펌 (Treuhaft, Walker, and Burnstein)에서 섬머 인턴쉽 하는것을 알고 , 일부러 찾아온 빌 클린턴, 이 때부터 둘은 같이 지내게 된다.
졸업 후 빌이 청혼을 했지만 힐러리는 "노"라고 대답,
둘은 각기 다른 길로 떠나게 된다.
워싱턴으로 진출한 그녀, 1974 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련
미 하원 법사위원회 소속 탄핵조사단에서 일하게 된다.
빌 클린턴이 다시 청혼을 시도하나, 역시 대답은 노.
그러던 차, 그 녀가 DC에서 변호사 시험을 치르나 낙방하여
상심하고 있을 때 빌의 급전을 받고 알칸사로 향한다.
무난히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 녀, 결국은 빌 클린턴과
1975 년 10월에 결혼하게 된다.

"Get two for the price of one", 빌 클린턴이 즐겨쓰는 말이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 백악관 최초로 영부인에게 따로
집무실을 제공했다. 바로 힐러리가 대통령의 파트너로 입각한 것.
즉, 한 명의 대통령을 뽑았지만 2 명(?)의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
전통적 탑-다운 관계가 아니라 일 대 일의 파트너쉽이 이루어진 것이다.

힐러리는, 곧 민생의 큰 관심을 끌었던 정책 ,
"전국민 의료 유니버설 케어" 입법을 추진해 나갔다.
힐러리의 독주체제에 불만을 품고있던 공화당 보수세력은
그 녀와 정면 충돌, 그 입법정책을 무산화 시키고 말았다.
권력의 정상에서 허물어진 그 녀의 민생정책 실현의 꿈,
곧 이어 화이트워터 부동산 투기사건이 파헤쳐 졌고,
그 조사중에 일어난 백악관 법률자문 빈스 포스터의 권총자살 사건,
-그는 한 때 알칸사 로-즈 로펌 파트너로 일했던 막역한 친구.
빌에게 불어닥친 아칸사 주지사 시절의 섹스 스캔들.
재임 2 기 말에 화려하게 (?) 끝내주었던
모니카 르윈스키 백악관 인턴과의 스캔들;
"했다 안했다. 그 증거가 스커트에
묻어있었다"등등. 발뺄수 없는 절명의 순간에서도
빌 클린턴은 하지않았다고 주장, 결국 위증죄로
탄핵소추에까지 회부되었다. 매일 눈뜨면, TV 화면을 꽉 채우는
남편의 "복잡한 여자관계". 속수 무책. 분하다. 어지럽다.
캔 스타 독립검사 보수주의자들의 수 년에 걸친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
클린턴은 마지막 그 자리만은 요행이도 지킬수가 있었다.

그 와중에 과연, 몸과 맘,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 지킬수가 있었을까?..
그 것으로 끝났것인가?
아니, 이제 2 막이 시작되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1 막의 주연이 빌 이었다면, 2 막은 당연히 힐러리에게 갈 사.

대통령 퇴임 후 그들은 거처를 뉴욕 주 고급 주택단지 채파쿠아로
옮긴다.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언 상원의원의 은퇴 후 빈자리를 겨냥,
힐러리는 2001년 미 상원에 도전, 무사히 의석을 획득했다.
그리고는 연임 선거에서도 67 퍼센트의 지지로 당선,
바야흐로 대권에 도전할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부쉬 정권에 지친 미 국민들 ,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바로 그 변화에 부응할 인물로 스스로 자처.
민주당 경선에서만 이기면 대권은
이미 자기 손안에 들어온 것이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낙관은 금물. 시카고 출신 초선 상원의원 오바마 (당시 47세)가 대권을 노리고 있는 줄은 몰랐었지.
그가 나선다 해도 충분히 맞설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었지.
그러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자신의 인기, 경력, 남편의 후광이
역 효과를 낼줄은 "진정 난 몰랐을거다."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그 것도 TV 앞에서.
동정표도 있었지만 전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고 판단,
오바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열심히 들어주었다.
오바마의 승리, 그 기쁨의 와중에서 걸려온 전화;
"국무성을 맡아달라. 나는 지금 국내 경제가 엉망이라
나라 바깥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오바마의 제의를 선뜻 수락했다.

2009 년 미 국무장관 취임.
역대 장관중 가장 많은 국가 112 개 국 방문, 도합 956,000 마일.
아랍권 수 개국 튜니시아, 이집트, 리비아 독재정권 몰락,
1955 년이래 최초로 버마와 수교. 많은 일을 해내었다.
유럽,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과
외교관계에 있어 "Smart Power"- 군사적 파워와 문화 물질 지원을 통한 부드러운 강공책-을 도입 평화적 공존의 기본을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리비아 밴가지 외교관 테러사건 등으로 욕도 많이 먹었지만.

첼시도 곁을 떠나갔고 ,
남편, 그 인간은 아직도 이 곳 저 곳에 얼굴을 내민다.
그래도 그는 나의 영원한 파트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다 해보았다, 그 것 한 가지만 빼고.
다시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아니면? .... 한참 생각을 해본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 "네 빛을 발하라"
생각해보라 "당신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 들,
왜, 그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났는지를"...


힐러리 클린턴.
여자 나이 65 세,
참 좋은 때다!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 오랫동안 속으로만 쌓여온 것들.
아낌없이 태울 수 있는 그 순간.
다시 불사를 수 있을 것이다.
"빛을, 네 빛을 발하라."
힐러리, (그리고 영자씨) 운명의 기로, "비탈길에 서다".
이제 65 세, 당신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깃발을 꼿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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