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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3 ] [이원창 컬럼]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할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저 지난번 교회 대출건 상의 드리려 왔습니다"
"아, 그 대출건, 그 론은 이미 하지말자고 내가 얘기했잖아요?"
"행장님, 제 생각으론 그 론을 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형, 내가 말했지만, 교회론은 더 신중하게 처리해야지.
가끔 신문에서 보듯이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론 상환이 어렵게 되잖아요?"
"이 론은 그 성격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냥 신용 대출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커뮤니티에 재투자하는 의미도 있구요. 거기다가
목사님 개인 주택을 2차 담보로 (에퀴티도 충분하고) 제공하겠다는데요?"
"그래도 곤란해. 담보가 있다고 해도 교회론은 좀 더 신중하게 다뤄야지"
두 번이나 행장님에게 제출했지만 반응이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방법은 더 이상 없는 것인가?...


지점으로 돌아온 나는 목사님 사모님에게 대출이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이에 사모님은 "은행일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못해줘야될 이유가 없잖아요? 반문해 오셨다.
" 한 가지 제안을 드린다면, 사모님께서 사범대학을 나오셨다고 하시든데
행장님에게 직접 그 대출에 관한 서한을 보내셔서 상환 능력, 충분한 담보 제공,
자금의 용도를 조목 조목 명확하게 밝혀주시면 어떨까요 ?
그저 저한테 말씀해주신 그대로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혹시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대출 신청인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목사님과 사모님 두 분이 교회를 위해 자신들이 사는 집을 담보로
내놓을 만큼 전력투구한다는 점을 은행측에서 충분히 고려했으면 합니다."


며칠 후, 행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네 이원창입니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장님은 질문을 던진다.
"이 형, 오늘 내가 그 교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이 형, 그거
혹시 이 형이 시킨것 아니요?"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이 형 , 당신이 시켰잖아, 내가 다 알아, 안다구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알았어. 그 론 다시 올려봐요, 다시 한번 보자구....고객을 위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는 안돼." 행장님,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속은 따뜻한 분이다.

행장님은 본인의 생각과 달라도 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행장실에 갈 때마다 충분한 검토를 준비하고 갔지만 역 부족이었다.
그의 질문은 상세했고 현실적이었다. 그냥 쉽게 넘 길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도 많이 배웠다.
일 년 내내 대출 건을 두고 서로 간의 이견으로 난항을 거듭했지만,
그로 인한 개인적인 불이익은 없었다, 전혀. 오히려 나를 승진시켜 주셨다.
90 년 초 한인 은행 최초로 샌 퍼난도 벨리 지역에 오픈한 지점에
두 번째 지점장으로 나가게된 것도 주로 그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벨리 지역 한인 상권은 아직 소규모 수준이어서, 나에게 맡겨진 주 임무는
그 지역 백인및 다인종의 중산층 마켙을 뚫고 들어가는 일이었다.



결국 그 론은 승인을 받았다. 목사님도 그러셨지만, 사모님이 앞장서서 자신 들의 집을
교회 일을 위해서 내놓겠다고 하니, 믿음을 스스로 행하신 것이다.
마지막 날 서류 사인을 위해 지점으로 오신 날,
허름한 잠바를 입으신 재정담당 장로님의 따뜻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모님의 역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꼭 한 사람 더; 바로 행장님의 지원이 없었다면....어땠을까?



그 후, 행장님은 은행을 떠나셨고 나도 그 은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미 24 년이나 흘러갔지만 그와의 인연은 더 깊어져 갔다.
멀리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지만, 거리가 멀수록 우리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은행에 있을 때 와는 전혀 다른 인과 관계; 상하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전환되었지만
그에 대한 나의 자발적 존경심은 예전보다 더 폭이 깊고 넓어졌다.
나와는 달리, 보는 각도가 깊고 더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을 그는 소유했다.
그래도 그의 집요한 추궁(?)과 지적은 계속되어 갔다. 사실 그래서도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나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쌓은 사고의 박스에서 벗어나
전체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도달했어도 아직 스스로의 결정을 못 내릴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연락하면, 내가 보지 못했던 이면을 나에게 보여주시곤 했다.
이제 LA로 다시 가게된 것도 그와 충분히 상의한 후에 내린 결정이다.

삼 십년 가까운 은행 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배워야 할 일이 많다. 나 자신의 주장,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늘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서 뭔가를 배운다.
"내 클래스에서 A 학점은 없다. 단,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논리를 제공하는 학생에게는
A를 주겠다"고 말한 윌리엄스 칼리지 교수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많이 알고있다 해도 항상 모르는 것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알고있던 것이 틀릴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도 마음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곡해하는 사람 들, 그 들에게도 내 마음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 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그를 통해 내가 더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를 때문이다.
비록, 내 맘에 안들고 또 의견이 다르다 하더라도. 정말 어렵지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할텐데...
그러기엔 내 마음이 좁다. 너무 좁다!
원하지 않았지만, 부하직원의 뜻을 알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안 행장님, 그 삶의 폭이 크다.
'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으로 부터- '새로이 배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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