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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07 분위기 파악 못하는 평통 수석부의장
분위기 파악 못하는 평통 수석부의장 당연히 금연지구인 호텔안에서 “이게 재떨이인가?” 하면서 담배를 피우려던 것은 미국 실정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넘기고, 여러 관계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기자단에게 불고기나 사먹으라고 대담하게 촌지를 내놓는 용감함(?)은 이곳 동포기자들을 완전 ‘물’로 봤던지, 아니면 ‘한국에서는 늘 그래왔기 때문이겠지’ 하며 애써 이해의 폭을 넓혀 보지만... 실질적인 평통의 수장(참고로 평통의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이다)이라는 분이 내놓는 그 공허하고 알맹이 없는 답변에서는 ‘진짜 분위기 파악 못하시네’라는 짜증 섞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지난 4일 민주평통 샌프란시스코 지역 협의회 주최 해외통일문제 간담회에 앞서 열린 신상우 신임 평통 수석부의장과의 기자회견. 매번 인선과정에서 잡음을 일으키는 미주평통에 대한 개선책과 앞으로의 새로운 역할론에 대해 뭔가 좀 시원한 대답을 한번 얻고자 했지만... 현지사정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신임 수석 부의장의 임기응변식의 답변은 “‘평통=똥통’이라는 일부 동포들의 시각이 앞으로도 좀처럼 바뀌기는 힘들겠구나”하는 낙담만 던져준다. 인선과정문제에 대해 “청와대의 입김을 차단, 낙하산 인사를 근절시키겠다”고는 약속했지만 “현지공관의 추천을 토대로 평통사무처에서 완전자율적으로 뽑겠다”는 것은 솔직히 기자에게는 ‘이전이나 앞으로나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실 평통뺏지를 달고 싶어 청와대에까지 ‘빽’을 쓸 정도의 인사라면 평통사무처에 직접 ‘빽’쓰는 것이 무엇이 그리 힘들까 싶다. 그래도 현지사정에 가장 밝은 재외공관(총영사관)측에 모두 일임해 낙하산 인사 시비 등의 인선과정의 잡음을 최소화 한다는 정도의 제도적 변화의 움직임은 있어야 뭔가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또 평통의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서는 ‘몸으로, 행동으로 움직이는 평통’ 운운했지만 제대로 감이 오지 않는게 사실이다. 웬만한 한인회 임원들이 모두 현직 평통위원인 마당에 새삼스럽게 “한인회와 평통이 어우러져”라는 계획은 도대체 무슨 얘긴지. ..” 하여간 문제를 지적하면 ‘약간의 시행착오’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한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까닭은 분명 평통의 존재이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 싶다. 미주 한인사회가 평통으로 인해 분열, 반목이 되던 말던 방관하는 것은... 혹시, ‘미주평통’ 어떻게 돌아가던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손해날 것은 없는 기관이라는 한국정부측의 여유있는 배짱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고기 값을 ‘덥썩’ 현찰로 내놓고 가기 보다는 기자들과 비빔밥 한그릇이라도 같이 먹으며 현지사정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그런 수장의 모습이 ‘평통=똥통’이라는 오명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게 해주는데 도움이 될듯 하다. 내친 김에 평통인선때마다 “골치 아프다, 골치 아프다”는 볼 맨 소리내는 총영사관에게도 한마디 당부하고 싶다. ‘평통’에 대한 우리 일반 동포들의 정확한 여론을 윗분(?)에게 똑바로 전달하는것 역시, 공항에 수석 부의장님 영접가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총영사관의 임무일 것이다.
2003-10-19 [노트북] 어줍지 않은 그들...
비록 ‘공산당’이라면 모두 손에 털이 ‘쑹쑹’ 나 있는 괴물쯤으로 묘사되는 교과서(바른생활)로 공부하고, 매년 6월 25일이면 ‘맨주먹 붉은 피로...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이라는 듣기에도 섬뜩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자란 세대지만, 철이 들고 나서 스스로를 한번도 ‘우익’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그것이 전쟁의 아픔을 피부로 직접 경험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무조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박정희.전두환 교육정책의 역효과(?)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이념과 민족이라는 저울질에서 기자의 가치관은 언제나 후자(민족)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난달 찾은 어느 시위장에서 맞부딛친 어느 생각없는 진보(?)의 색깔앞에서 기자의 이러한 가치관은 잠시나마 ‘움찔’하고 만다. 지난 28일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열린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미군점령을 반대하는 대규모 반전시위... 미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반전단체들이 대거 참여한 이날 시위에 한반도기가 그려진 오렌지색 복장으로 통일한 1.5세와 2세 단체 한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에 ‘전쟁반대’라고 쓰인 흰색 띠를 질끈 두른 그들은 장구, 북, 꽹과리까지 동원, 한반도의 평화결의안과 조속한 북핵 해결을 목청껏 외치며 시위의 분위기를 한층 돋구어 주고 있었다.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행진하는 그들의 보기 좋은 모습, 하지만 그들의 손에 쥐어진 어느 시위 피켓을 보는 순간, 기자에게는 염려와 혼란이 교차한다. ‘US OUT OF KOREA’,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반미성 구호가 적힌 시위 피켓... 그렇다면 그들은 주한미군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가로 막고 있는 방해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미군만 철수하면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이 무조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어떤식의 통일이든 무조건 통일만 되면 된다는 생각일까? 물론 그저 아무생각없이 지나치게 분위기를 탄 까닭일 수도 있겠지만, 기자는 이들의 조금은 위험스러운 이 구호에 설사 ‘극우’라는 오해를 사더라도 꼭 몇마디 충고를 보내주고 싶다. 이날 시위에 참가했던 몇개의 한인단체들은 이전에도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취지였지만) ‘미점령군’ 운운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어줍지 않은 촛불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기자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착각은 주한미군과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동일시 하는데 있다고 본다. 별 명분없이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과 어찌됐던 과거 6.25전쟁에서 5만 4천명이라는 목숨을 내주며 대한민국의 체제를 지켜준 미군이던, 똑같은 세계평화의 훼방꾼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물론 ‘동북아에서의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는 주장도 전혀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한미군이 한반도 전쟁억제의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점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북한이 줄곧 주장하는 ‘민족대단결’이란 통일전선(연방제국가 창립, 미군철수 실현, 국가보안법 폐지 및 친북세력 확대 강화)을 지지한다면 더 이상의 긴말은 필요없겠지만, 미군철수는 현재의 한국상황으로 봐서는 시기상조라고 사실을 분명 알아야 한다. 미군철수가 가져올 수 있는 경제적 손실(외국자본의 유출)은 제쳐두고라도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북한정부를 ‘한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철썩같이 믿고, 아직도 한반도의 모든 군사동향을 전반적으로 정찰, 감시하는 정보처리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너무나 큰 도박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북핵문제처럼 정작 우리 목숨이 걸린 일에도 미국이 해결해주기만 기다리는 것 역시 비참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국정부는 자주국방이라는 목표로 지난 수십년 동안에 걸쳐 막대한 투자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상적인 사고에만 사로잡혀 10년 후 쯤도 아닌 지금 당장 ‘미군철수’운운하는 이들은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전쟁에 따른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해 도대체 어떤 자신감이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한민족이면 그 누구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5천년 수 많은 외세의 침략과 가난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의 아픔을 제대로 아는 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힘들게 이룬 모든 것을 거는 위험하고 성급한 그들의 통일안에 지지를 보내줄 사람은 없을 듯 하다. 미군부대에서 난장을 쳤던 ‘한총련’과 같이 ‘주한미군’을 한반도 점령군으로 우기는 그들의 어줍지 않은 사고와 행동들이 왠지 본국에서 건너온 ‘반미’라는 유행성 병충해에 걸린 풋사과를 떠올리게 한다. 이동혁
2003-10-10 민가영 기자의 프리즘(찬밥신세 면하기)
“코리아 타운 형성에 대한 의견과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코리아 타운 만드는 것을 적극 지지합니다.” “상업성을 배제하고 진정한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형성되길 바랍니다.” “한인 학생들의 이중언어 교육에 대한 방안은 있는지요?” “다민족이 모여 사는 도시인만큼 이중언어 교육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중언어 교육을 적극 찬성합니다.” “한인 학생들만을 위한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계획은 구체적으로 없지만 이중언어 교육을 적극 지지합니다.” 지난달 30일 샌프란시스코 시장 후보 중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4명의 후보들과 지역 한인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간담회에 참석한 후보들의 답변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각각 4명의 후보들이 제한된 시간에 맞춰 열심히 답변했지만 요약해보면 결국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지지한다”, “적극 찬성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원방안이나 계획은 아직 없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닌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습니다. 시장 후보로서 소수민족의 커뮤니티가 주최하는 간담회 자리에 나온다면 적어도 그 커뮤니티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가장 핵심 과제는 무엇인지, 또 시정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정도는 공부를 하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나오라니까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다만 몇백표라도 건져야겠기에 억지춘향격으로 나와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다가 질문하면 “적극 찬성한다, 지지한다”라며 청중들 비유만 맞추면 되는 걸까요. 취재차 앉아 있는 기자의 마음을 더 씁쓸하게 한건 중요한 미팅이 있다며 간담회 도중 청중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뜨는 한 후보의 행동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미팅이었기에 그 많은(우리가 보기에는 충분히 많은 수였지만 후보들 입장에서는 적었을 수도 있겠지만) 청중들을 뒤로 하고 용감하게 나갈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그날 행사가 호텔의 컨벤션룸에서 250여명이 모인 간담회가 아니라 커뮤니티 칼리지 정도의 대강당에서 2,500여명이 모인 자리였어도 그렇게 도중에 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마 결코 못했겠지요. 2,500 표가 눈앞에서 어른거릴텐데 감히 어느 용감한 후보가 그런 무모한 행동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중요한 미팅이라해도 그렇지, 모르긴 해도 아마 미팅 약속을 뒤로 미뤘을 겁니다. 그래도 이번 행사는 한인 커뮤니티의 각종 행사를 취재하러 다녀본 기자가 보기에 대단한 인원동원이었습니다. 주최측에서 미리 준비했던 의자가 부족해 뒤쪽으로 50여개의 의자를 더 갖다 자리를 만들고 그것도 부족해 일부는 앉지도 못한채 뒤쪽에 서서 후보들의 공약을 경청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행사 자체로만 본다면 더없이 성공적인 행사였지요. 참석한 후보들이 조금만 더 성의있는 답변을 했더라면 금상첨화였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후보들만 나무랄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 후보들이야 선거를 한달여 남겨두고 좀 바쁘겠습니까? 고작(?) 250명 청중이 모인 간담회에 와준 것만도 감사할 일이지요. 문제는 우리입니다. 권익보호는 외치면서 정작 유권자 등록은 안 하는 한인들, 요구사항이 많다가도 멍석 깔아놓으면 침묵을 지키는 한인들... 북가주 한인 인구가 15만명이라고 우리끼리 맨날 떠들어야 누가 알아줍니까. 유권자 등록자는 고작 몇천명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이 판단기준으로 삼는 한인 커뮤니티의 규모는 결국 유권자 수인거지요. 표로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말입니다. 한미연합회 샌프란시스코지부가 조사한 데이타에 따르면 한인 100명 중 고작 3명만이 유권자 등록을 한다고 합니다. 상당히 미미한 수치입니다. 지난 7일 선거에서는 한인들이 어느 정도 투표에 참가했는지 아직 발표된 통계는 없지만 기대이상의 수준은 아니라고 짐작됩니다. 우리 2세들이 주류사회에서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몇 년 후 샌프란시스코 시장 선거를 앞두고 개최될 후보 초청 간담회에서는 수천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성의없이 답변하는 후보들을 가차없이 질타하고, 후보들도 한인 커뮤니티의 저력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본인들의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커뮤니티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해봅니다.
2003-10-02 한의사와 함께 하는 5분 산책
“세상에서 못해 먹을 직업이 대통령”이라는 코메디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전 전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에 대한 환수가 지지부진하다 보니 국민 감정은 부담스럽고 공소시효 만료도 다 됐다 보니 생쇼를 하는게 아닌가 싶게 전 대통령의 가재도구 압류 경매라는 사상 초유의 이벤트를 벌릴 모양입니다. 피아노, 텔레비전, 소파, 주전자에다 시계와 커프스 버튼 등의 장신구까지 포함했고 7년이나 애지중지 길렀다는 진돗개 두마리까지 주인을 바꿔야 할 비참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니 누가 커서 대통령하라고 시킬 부모가 있겠습니까? 예금 통장엔 달랑 29만원 밖에 없어서 여기저기 옛날에 맺어둔 인연으로 손 벌리면 거절할 수 없어 쥐어주는 지인들의 푼돈으로 질긴 목숨 연명해야 하고 대한민국 생활보호 대상자 우선순위 영순위로 전락해야 하는데다가 툭하면 백담사나 청송 감옥소에 지정석 예약해야 하고 자식 놈들은 몽땅 푸른 수의에 번호표 붙여서 그걸로 호명해야 할 상황으로 몰고 가야 할 직업 중에 최악의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양입니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 여당 민주당의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됐어도 자기를 대통령 만들어준 민주당을 탈당해야만 하고 그 당의 대부인 전임 대통령을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힘 없는(?) 현 대통령의 사면초가적인 상황을 보면 내 자식은 절대로 저런 뭣 같은 직업에 연연하지 못하도록 아예 미국 국적을 갖고 태어나게 만들자는 굳은 결심으로 원정출산에 나서는 지혜로운 모성애(?)로 전세계에 가십거리를 제공해서 나라 망신 톡톡히 시키는데 일조를 할 모양입니다. 옛날로 비유하자면 대통령은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이고 최고 결정자인 왕에 해당하는데 “왕은 몰염치(왕이 어떤 행동을 해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라는 말로 그 권한의 절대적인 면을 부각시키기도 했습니다. 상식적인 면으로는 왕이 모든 결정 하나 하나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니까 낯 뜨거울 일이 생길 수 없다는 이야기지만 폭군에 간신이 만나면 이 말이 사회 통념상 부끄러운 일도 왕에게는 하등 관계가 없이 자기하고 싶은대로 해도 어느 누구도 입 뻥끗해서는 안된다는 초법적인 면을 변명하는 말로 뜻이 와전되어서 쓰여진 적도 있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사회상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높은 자의 몰염치가 국민적인 저변 확대를 이미 구축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만큼 여기저기서 통계상의 기록을 갱신하는데 분주합니다. 신용불량자가 여덟명 중에 한명이고 이혼률이 미국 다음으로 높고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도 많고 술소비량이 소련 다음으로 많다는 등 통계상으로 세계 1~2위를 다툽니다. “빨리 빨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국민성으로 보면 세계 1위 타이틀 쟁취도 조만간 일 듯합니다. 요즘 나오는 건강식품도 몸에 좋다는 약초를 여든가지라든가 백가지라든가 산에 있는 것, 들에 있는 것 몽땅 다 넣었다는 식으로 선전합니다. 몽땅 넣었으니까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먹으라고 유혹하고 또 그렇게 알고 사 먹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현대인 같은 기분이 드는 분위기입니다. 약을 배합할 때 군.신.좌.사라는 엄격한 방제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살인이 여반장(사람 죽이는게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쉽다)”라는 경고를 “옛사람들은 약에 대한 내성이 없어서 비록 몇가지 섞어 먹어도 병이 나았지만 현대인들은 온갖 약을 콩 주어 먹듯 했기 때문에 약에 대한 내성이 강해져서 좋다는 것 몽땅 섞어도 부족하다”로 바꿔버린 모양입니다. 군약은 꼭 있어야 할 것이고 신약은 보조제이고 사약은 약성을 운반하는 심부름꾼 역할을 합니다. “호랑이 없는 골짝에 여우가 왕이다”식의 정치판과 군.신.좌.사의 개념없이 뒷동산에 있는 모든 약초를 몽땅 먹어 치워야만 속이 후련해질 듯한 건강보조식품 시장판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아직 내성이 덜 생긴 원시인 체질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03-09-18 [노트북] 웬 귀중한 자산?
2년 전이었던가? 상항을 방문했던 재외동포재단 권병현 이사장이 “6백만 해외동포들이야 말로 고국의 귀중한 자산” 이라며 우리를 힘껏 치켜 세웠던 때가.... 지난주, 다시 상항한인회관을 찾은 권 이사장....이번에는 확실한 수치까지 내놓으며 우릴 한번 더 붕~ 띠워준다. “지난해 해외동포들이 모국에 송금한 액수가 48억달러, 관광수치까지 합하면 자그만치 51억달러, 한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기업들의 전체 투자액의 50%가 넘는 어마아마한 금액입니다.” 그리고 권 이사장은 그 찬사에 뒤를 이어 해외동포들의 혁혁한 모국의 발전 공헌에 감사하는 의미로 자리한 참석자들을 향해 큰절까지 올린다. 임기 초, 해외동포센터건립이니 해가며 장미빛 청사진을 내놓았던 그가 임기 막바지인 지금까지 실제로 우리에게 해준 거라고는 돈 안드는 말(칭찬)과 큰절 뿐이라 내심 섭섭하긴 했지만, 기자는 그래도 저 만큼이라도 알아주는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실 차관급이라고는 하지만 힘없는 한직에 불과한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 죄가 있다면 괜히 생색이나 내려고 이름만 거창하게 ‘재외동포재단’이라고 덜컥 붙어 놓고 예산은 쥐꼬리만큼 쥐어주는 본국정부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본국에서는 서로 치고 박아 대느라 정신이 없어서 인지 ‘재외동포특례법’같이 자신들의 표밭과는 별 상관 없는 법안에 관심을 두는 국회의원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미국출장길에 순진한 우리 단체장들이 우르르 몰려 환송해 주고, 동포간담회다 뭐다 열어 주면 할말이 궁하다보니 “ 해외동포들의 지위향상과 권익을 위해서 ...”어쩌고 저쩌고 판에 박힌 말만 해대다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재외동포특례법 한번 들먹이고 돌아가서는 별 관심 없으니 당연히 함흥차사, 감감무소식이다. 덕분에 우리 단체장님들은 아까운 밥값만 날리고 재외동포특례법은 별 대안도 없이 내년이면 폐기처분이 확실히 되고 있는 상황이다. 동포센터 건립도 그렇다.. 일년에 50억달러씩 송금하고, IMF다, 연례행사(?)인 수해다, 불우이웃돕기다, 하여간 두고 온 친정이 안스러워 수시로 주머니를 털어주는데 본국의 동포센터마저도 우리 돈으로 직접 지으라니... 이건 말로만 귀중한 자산이지, 한마디로 찬밥신세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9.11 테러 이후 갈수록 심화되는 반(反) 이민 정서 및 인종차별 경향으로 미국내 한인들이 곤욕을 겪고 있다는 인터넷판 본국신문 기사밑에 달린 어느 본국네티즌의 의견... “조국 싫다고 보따리 싸가지고 가더니....댁들이 몸바쳐 충성한 나라에서도 찬밥신세구려” ‘쌤통’이란 투의 어이없는 그 글을 읽으며.... 이곳 일간지들이 또 앞장서 벌이는 본국수재의연금 모금 캠페인에 그래도 한핏줄이라고,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주머니를 털어줄 착하디, 착한 우리 동포들이 떠오른다. ‘귀중한 자산’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 했으면 정말 찬밥신세는 면하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닐까 싶다. 중국 청조말의 일이었다고 한다. 동남아 지역에 나가 살던 화교들이 유태인들 처럼 뛰어난 상술을 발휘, 지역 경제권을 모두 움겨쥐자 현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됐고, 급기야 폭동이 일어나 화교들이 재산을 약탈당하고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에 당시 화교들은 모국인 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청의 서태후는 “나라를 버리고 간 이들은 더 이상 우리의 백성이 아니다”는 이유를 들어 일언지하에 그 도움을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이후, 1970년대부터 세계각처에 살고 있는 화교(화상 華商)들을 감싸는 정책을 펼쳐 중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도 그 성공을 모델로 한상(韓商)네트워크라는 것을 구축했고, 현재까지 별 성과는 없지만 하여간 오는 10월 제 2차 세계 한상대회를 본국에서 개최한다. 부디 한상의 그 취지와 목적이 해외동포들의 모국 투자유치라는 계산적 속셈만이 전부가 아니길 기대해본다. 일요시사
2003-09-02 Pictorial Presentation of Korea
Pictorial Presentation of Korea (1945-1948) by Choi Sangjin Pictorial Presentation of Korea (1945-1948)by Choi Sangjin Captain Chung became a veterinarian practicing in an affluent shopping mall in the Kahala area after retiring from military service and has established himself as a successful figure in the Korean Community of Honolulu. Dr. Chung has been a member of the University Club, a gathering of those second-generation professionals of the Korean Community in Hawaii. During my term of service (1984-1986) as Korean Consul General of Honolulu, my family and I enjoyed the genuine hospitality and friendship of Dr. Chung and his sweet wife Oh Sook Cha (吳淑子: a graduate of Kyunggi Girls High and Sook Myung Women’s University). When I was packing to leave Honolulu for a new assignment in Seoul, Dr. Chung invited me to his place and without much ado, he presented to me his whole collection of slides and other films on his projector. At that time I didn’t even know the fact that color pictures existed then. He was so kind to give all those precious materials to me, allowing me to share with any friends of mine. Now I feel like reciprocating a part of my gratitude to Dr. Chung Nam Young by doing so. Dr. Chung once told me that his monthly payment as an American army captain at that time was more than 43 times of the average earning of his Korea relatives. I just hope that you would enjoy looking back at our own portraits of 1940’s. 사진보기 1945년의 한강 1945년의 창경원 1945년의 China Town 1945년의 신촌 1945년의 서울시청 1945년의 시청앞 거리 1945년의 시청앞 거리 2 1945년의 신탁통치 반대 데모 1945년의 대구병원앞의 소녀 1945년의 이화여대 1945년의 고등학교 1945년의 화신백화점 1945년의 중앙청 1945년의 남대문 1945 피난열차 1 1945년의 피난열차 2 1945년의 서울역 1945년의 서울거리 1946년의 마포모습 1948년의 이승만 연설장면 1948년의 이승만 정권 수립환영 만세 1948년의 이승만 정권수립 기념퍼레이드 1948년의 남대문 1 1948년의 남대문 2 1945년의 유명 연예인 모습
2003-08-08 화백 이명수: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예술
순수예술을 보다 쉽게 일반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동양화가가 있다. 본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30여년간 동양의 미를 화폭에 담아온 이명수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최근 이 화백은 화선지 위에 표현하던 예술 세계를 범위를 넓혀 보다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한 방법으로 벽화를 선택, 활동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산타클라라 소재 ‘길목식당’, 밀피다스의 ‘오이시 스시’, 오클랜드의 ‘예당’에 가면 이 화백의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남가주 지역의 오렌지 카운티에서 활동무대를 이곳 북가주로 옮긴 이 화백을 만나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들어 보았다. 대중과 가까워지기 위해 벽화 선택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면 훨씬 자유롭게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순수미술의 틀을 벗어나 벽화라는 새로운 미술세계, 어찌 보면 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반면 순수예술로부터는 멀어질 수 있는 분야에 선뜻 나선 것에 대한 의아심에서 비롯된 기자의 질문에 이 화백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무겁게 지고 있는 짐들을 다 버려야 비로소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나이 50이 넘어서야 그런 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벽화요? 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했습니다. 예술인으로서의 아집을 버림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지요” 대중을 외면한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결국 일반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세계라고 그는 강조한다. 이 화백이 벽화를 처음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몬트레이 지역 쇼핑센터에 대형 벽화를 그리면서부터다. 당시 몬트레이시의 특성에 가장 잘 맞는 벽화를 그려내기 위해 시 관계자와 여러 차례 협의 끝에 주제를 정하고 벽화작업에 돌입했다고. 이외에도 산타클라라 지역에 거주하는 미국인 주택 내부와 한인식당인 ‘길목’, ‘오이시 스시’, 오클랜드에 새로 오픈한 보석전문점 ‘예당’에도 벽화를 그렸다. “일반인들이 쉽게 감상할 수 있고, 보기에 부담이 없는 것” 벽화에 대한 이 화백의 지론이다. 본국의 내로라 하는 미술대학에서 동양학 전공, 뉴욕의 비주얼 아트 스쿨에서 판화 전공, 유수의 예술제에 작품 출품 등 전문 예술 분야에 몸 담고 예술성을 인정받아온 예술가가 대중에게 가까이 가기는 쉽지 않았을 터. ‘무거운 것, 다 버렸다’는 그의 말에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그의 각고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일반인과 예술인의 가교 역할 하고 싶어 “북가주 지역에는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예술인들이 함께 모여 지역 문화 창달을 위해, 또 문화예술 보급을 위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문화 공간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북가주 지역이 이처럼 문화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것은 예술인들과 일반인들 공동책임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당장 얻어지는 이익이 없다는 것이 문화공간 부재의 가장 큰 요인이겠지만 이로 인해 야기되는 문화 빈곤 현상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만큼 손실이 크다는 것이 이 화백의 생각이다. 한인단체 사무실이나 제법 큰 규모의 한인업체 사무실에 변변한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는 것도 북가주 사회의 문화공백을 의미한다며 “문화 예술을 가까이 할 때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 화백은 풍부한 볼거리와 다양한 문화공간을 갖추고 있는 뉴욕만큼은 아니더라도 북가주 지역에도 최소한의 예술인, 문화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북가주 지역에는 문학이나 음악활동을 위한 단체들의 활동은 활발한데 비해 미술분야는 그렇지 못하다”며 “한국의 미를 제대로 보여줄 변변한 화랑 하나 없는 것은 북가주 한인들이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서양 미술계에서 이미 동양화의 선, 색채 등에 대해 관심도가 높아지는데 비해 오히려 우리는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아쉬워한다. 이렇듯 북가주 지역이 문화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배경에는 일반 대중과 예술인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형성되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라며 일반인들과 예술인들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기도 한다. 현재 이 화백은 산타클라라 소재 임마누엘 장로교회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동양화 강습을 하는 등 예술 보급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대중에게 인정받고,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이 화백. 대중을 향한 그의 예술활동이 기폭제가 되어 북가주 지역에 새로운 문예부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3-07-24 상항지역 한인회에게 묻고 싶은 말
일요시사의 노트북에 실린 내용입니다. 상항지역 한인회에게 묻고 싶은 말 솔직히 기자는 요즘 상항한인회의 이사회 취재를 거의 나가지 않았다. 부르는 곳만 쫓아다니기 보다는 한 줄이라도 기획성 있는 기사를 써 보자는 편집방향의 변경 탓도 있지만 지난 3월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이사회에서 받은 ‘쇼크’(?)탓도 없진 않다. 당시 기자는 본국과 한인사회에서 적지 않은 돈과 노력을 쏟아 부어 힘들게 문을 연 한인회관 내 도서관이 관리소홀로 인해 망가져 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사회에서 어느 이사에게 생각 없는 기자라는 힐책을 받았다. “가뜩이나 동포들의 한인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마당에 생각없이(?) 그런 부정적인 기사를 쓰면 한인회가 어떻게 활성화 되겠느냐”는 꾸짖음이었다. 물론 “제가 무슨 한인회 회지(會誌) 기자인줄 아시냐”며 나름대로 항변은 했지만, ‘모 업체로부터 컴퓨터 지원도, 도서정리계획도 이미 착착 진행 중이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해 주는 한인회 임원들에게 기자는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부터 찬물만 끼얹는, 그런 괘씸한 놈’으로 이미 찍혀 버린 듯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기자의 ‘쇼크’는 그런 험악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 오는 길, 스스로에게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말 내가 너무 성급했었나?”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기자는 지금까지 한인회에 대한 말을 최대한 아끼려고 노력해왔다. ‘한국의 날 퍼레이드 취소’, ‘한국의 날 행사장소 취소 당해’ 기자의 참을성이 모자란 탓도 있겠지만, 다른 언론을 통해 접한 한인회에 대한 또 다른, 이런 실망스러운 기사들 때문에 이젠 그 동안 한인회에게 묻고 싶었던 말들을 몇 가지 적어본다. 한인회는 몇 달 전 ‘한국의 날 퍼레이드 취소’ 결정의 이유를 한인업소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라고 밝혔고, 그 결정에 힘을 보태기 위함인지 어느 언론을 통해 대다수의 동포들이 이를 찬성하고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렇다면 첫번째 이사회에서 밝혔던 ‘한인업소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퍼레이드 예산을 미 주류 기업들을 통해 확보하겠다는 계획’, 이를 제대로 노력이나 해보고 난 뒤, 지난 십 여년 동안 공들여 명맥을 이어온 퍼레이드를 취소한 것인지 먼저 묻고 싶다. 그리고 대다수 동포들이 이에 찬성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또한, 보다 나은 행사를 위해 지난 1월부터 별도의 ‘한국의 날 상임준비위원회’을 발족시킨 한인회가 어떻게 기본적인 예약과 확인과정 조차 알지 못해 행사개최 불과 두 달을 남기고 시(市)로부터 행사장 예약을 취소 당하는 망신을 당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런대로 청소는 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컴퓨터 한대는 커녕, 마루바닥에 책들이 수북이 싸여 있는 도서관은 도대체 언제쯤이나 정상화 되는 것인지 답해주었으면 한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 동포들의 한인회 외면이 기자의 생각 없는 기사 탓인지, 아니면 제대로 일 안 하는 한인회 탓인지 판단 내리고 싶다.
2003-07-16 역사의 오류와 북가주한인인물 100인집
일요시사의 노트북에 실린 내용입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이렇게 시작되는 조선왕조 5백년의 27왕들 중에 ‘조(祖)’나 ‘종(宗)’ 이라는 묘호(廟號)를 얻지 못한 임금이 딱 두분이 있다. 바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두 임금에 대해 ‘쫓겨난 왕’이라는 이유때문인지 많은 부분을 그들의 ‘악행’에만 할애하고 있다. 그 덕분에 후세의 일반인들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똑같이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폭군’ 쯤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재위시 무수한 사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사실이지만,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명백한(?) 폭군 연산군과 정치역학의 희생자라고 할수 있는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은 반란의 당위성을 구하려던 인조반정 세력의 다분히 고의적인 공작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조작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남아 우리에게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을 끌어들여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어 국고를 거덜내고 ,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심지어는 큰어머니격인 박씨 부인까지 범하는 근친상간이라는 만행까지 저지른 엽기임금(?) 연산군, 그에 비해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아 분조(비상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의 소임을 다하고, 더 이상의 전란을 막기 위해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연산군과는 분명 격이 다른 임금이다. 불안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형제를 죽이고,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페시켰지만 조선왕조의 전례로 볼때, 사실 반정의 명분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광해군의 폐위는 그에게 치명적인 죄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시대의 정세를 읽지 못하던 일부사대주의자와 왕권을 탐내던 인조, 한마디로 ‘전두환’일당같은 무리들에 의한 ‘쿠데타’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의 이해일 것이다. 이렇듯 한번 잘못 기술된 역사는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 후유증을 남긴다. 우리의 미주한인 100년사 역시 유사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탓에 미주지역에서 그와 다른 노선을 걸으며 조국독립을 위해 힘쓴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조명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달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흉상제막식과 전국총회를 무사히 마친 미주한인 이민백주년 샌프란시스코 기념사업회는 현재 북가주 한인백년사와 한인인물 100인집 편찬사업만을 남겨두고 있다. 백년사 편찬은 부족한 인력과 촉박한 시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구전(口傳)보다는 확실한 자료수집을 통해 지난 백년간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려고 노력중이다. 한인인물 100인집 역시, 객관성에 최대한 촛점을 맞추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인물’들을 선정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아니면 그 누가 되랴”는 자기도취성 발언으로부터 “100인 안에 내가 선정되지 않으면 가만히 안두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공공연히 퍼트리며 인물사편찬위원들에게 은연중에 압력을 넣는 한심한 인사들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역사를 무슨 장난쯤으로 아는 이런 인사들의 해괴망칙한(?) 작태에 기자는 솔직히 할말을 잃는다. 무슨 1~2년 해먹는 단체장 선출하는 것도 아닌, 우리 후세들에게 두고 두고 남겨줄 소중한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이런 몰지각한 생떼를 쓴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탈락 제1 요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선정되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인사들... “저 사람보다 내가 못한게 뭐 있다고?”하는 바보같은 질문보다는, 먼저 하루종일 막노동을 해가며 번 돈의 1/3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던 우리 이민 선조들의 그 힘든 모습앞에서 “내가 과연 100인 안에 들 자격이 있을까?” 스스로 묻고, 또 그 해답을 스스로 구해 보기 바란다. 인물사편찬...현존인물까지 일부 포함한다는 것에 대한 일부의 우려가 있긴 하지만 100년을 맞은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그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는 소중한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그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또 그저 주류사회의 매스컴을 조금 탔다고 해 결코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 이민사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물사 편찬위원들의 객관적이고 현명한 판단으로 우리 손으로 만드는 우리 역사에 오류가 남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이동혁
2003-06-28 민가영 기자의 프리즘/ 미국은 교육천국(?)
며칠 전 신문을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위장 입양’이라는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미국 국적을 안겨주기 위해 원정 출산이 한창 붐이라고 떠들썩하더니 이번에는 위장 입양이라는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는군요. 자녀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기 위한 한국 부모들이 자녀를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위장으로 입양시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교육을 위해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포기한다는 얘깁니다. 정말 대단한 교육열 아닙니까? 사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한국 부모들이 자녀를 미국에 보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100퍼센트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그곳의 교육 현실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의 행동양식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닐테지요. 하지만 위장 입양까지는 좀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정출산의 경우 일부 부유층의 출생지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위장 입양은 상당히 다르다고 봅니다. 입양관련법에 따르면 미 시민권자는 18세 미만 어린이를 입양할 수 있으며, 고아가 아니더라도 친부모의 동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입양의 목적입니다. 순수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영주권 취득만을 위해 입양이라는 제도를 편법으로 이용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위법임에 틀림없지요. 이미 연방 이민 귀화국이나 미 국무부가 위장 입양에 대한 조사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는군요. 한국전 이후부터 경제가 한창 부흥하던 70년대까지 한국은 세계 최고의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남기면서까지 홀트 아동복지기관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입양아들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위장 입양이라니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운 고아들을 입양해 키우려는 외국인 부모들이 까다로워진 법 절차 때문에 선의의 피해를 입는 건 아닐까 우려됩니다. 지난해 북가주 밀알선교단이 주최한 밀알인의 밤 행사에 초청되어 나온 한 한국인 입양인이 생각납니다. 앞을 못보는 한국인 소녀가 역시 앞을 못보는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장애를 딛고 훌륭하게 자라나고 있는 모습과 본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한국 교회에 다니면서 떠나온 고국을 알기 위해 열심이던 모습. 비록 장애를 갖고 있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동양인을 자녀로 삼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 모범적인 양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위장입양이 성행하게 되면 이런 모습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 미국에서 교육시켜야 할까요? 한국의 교육현실이 그렇게 악화된 걸까요? 반면 미국 교육은 정말 그 아이들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보증수표라도 제공해주는 걸까요? 얼마전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교육예산을 삭감해서 교사 1인당 학생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교육환경이 점점 더 열악해져 간다고 각 초등학교마다 교사들이 교육예산 삭감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학부모들을 독려해 데이비스 주지사에게 편지보내기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또 일부 미국인 부모는 미국의 공교육을 믿지 못하겠다며 대안학교를 설립하거나 홈스쿨링으로 자녀들의 교육을 대신 맡아 하고 있다는 보도도 가끔 봅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볼 때 미국도 결국 교육천국은 아닌 듯 싶은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교육시키길 간절히 원하고, 별별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미국 땅을 밟으려 하는 한국 부모들이 좀더 신중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사실 이런 말 한국에 있는 학부모들에게 하면 욕 먹기 십상입니다. ‘너는 미국에서 애들 교육시키고 있으니까 그런 배부른 소리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어디에서 교육을 시키든지 소신과 주관이 뚜렷하다면 그곳이 바로 교육천국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2003-06-22 단일화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리 식구!
‘그래도 우리 식구다’라는 넉넉한 마음의 고마운 북가주 동포들은 오는 27일 달라스로 가는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 두 체육회를 위해 속속 지갑을 열고 있다. “엄마, 아저씨들이 비행기표 값이 없어 못간데”라며 아르바이트로 푼푼이 모은 돈을 선뜻 내놓는 어린 학생으로부터 정부의 연금으로 근근히 생활하는 노인들까지 그리고 불경기에 허덕이는 한인업소와 자신들의 행사비도 부족한 한인단체들 모두 ‘북가주의 명예’를 위해 싸우러 가는 두 체육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뒤늦게 터져 나온 단일화 결렬과 기금부족으로 출전여부마저 불투명하게 보이던 두 체육회는 이러한 동포사회의 온정으로 인해 18일 현재 샌프란시스코 2만 8천 8백달러, 실리콘밸리 3만 1천 9백달러를 모금, 달라스로 가는 채비를 차곡차곡 준비해 나가며 체전 출전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본지 일요시사도 지난 4월 미주 한인백주년 기념사업회 성금 전달에 이어 ‘동포사회와 함께 한다’는 뜻에서 18일 오전 10시 두 체육회에 각각 500달러씩, 총 1천달러의 미주체전 성금을 전달했다. 본사에서 있은 이날 전달식에서 본지 유대진 사장은 “비록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동포사회의 도움으로 운영되는 언론사도 동포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몫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임직원 일동이 정성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에 SF 한인체육회 나기봉 회장은 “기금모금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는 두 체육회에 힘과 용기를 북돋아준 일요시사에 감사한다”며 “동포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언론사의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SV 체육회 신민호 회장은 “체육회에서 봉사한 이후 언론사에서 기금을 전달 받기는 처음이다”며 “성원에 감사하고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체육회는 상항지역 한인회(3천달러), 상항 한인상공회의소(3천달러), 상항지역민주평통협의회(1천달러)의 성금과 에나다(Enada) 장 학생이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모은 200달러, 이제남 평통위원의 5백달러, 이충일 제 4대 북가주 한인회장의 1천달러, 김한일 치과 1천달러 등의 성금으로 현재 선수들의 항공편 예약은 마친 상태라고 한다. 한편 실리콘밸리 체육회(회장 신민호)에도 후원금이 답지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체육회는 17일 현재 모금액이 3만 1,900달러라며,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미주체전 출전 경비인 5만 5,000달러를 무난히 모금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산타클라라 갤러리아 마켓 앞에서 바자회를 갖고 900달러의 수익을 올린 체육회는 오는 20일부터 22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2차 바자회를 가질 계획이다. 일요시사 이동혁, 조승현 기자
2003-06-06 SF.SJ 체육회 단일팀 무산
양 체육회가 조인식에 앞서 사전 조율을 위한 모임을 갖던 중 ‘잘 해보자’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출발은 좋은 듯 했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한 체육회 단일팀. 전체 체육인의 여론을 수렴하기에 앞서 몇몇 임원진들이 무리하게 단일화를 추진, 결국 단일화 파기까지 이르게 된다. (사진 왼쪽 나기봉 회장, 오른쪽 신민호 회장) 단일화->파기(?)->단일화->끝내 결렬... 실패로 끝난 SF. SV체육회 단일팀 체육회 단일팀 구성 무엇이 문제였가? 북가주 지역 체육인들의 화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진행되어 오던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 체육회의 단일팀’이 미주체전 20여일을 앞두고 결렬됐다. 그간 단일화냐, 단일화 파기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던 두 체육회는 지난달 27일 실리콘밸리 체육회 신민호 회장이 샌프란시스코 체육회 나기봉 회장에게 단일팀 철회를 알리는 공문을 팩스로 보냄으로써 양 체육회의 단일팀 출전이 완전 무산됐다. 출발부터 내외적으로 말이 많았던 양 체육회의 단일팀 구성, 체전 20여일을 앞두고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된 이유는 무엇인지 짚어본다. 축구 선수 선발 위해 논의 중 폭행사건 발생? 단일팀이 파기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화부족과 지역 이기주의를 들 수 있다. 이번 단일팀 공조는 대내외적인 여러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단일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단일화하자는 체육인들의 전체적인 여론이 아닌 임원 몇몇이 의견일치를 본 후 일을 저지른(?) 케이스이다. 그러다보니 체육회의 산하단체인 각 연맹들 중에는 앞뒤사정 보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려는 임원들에게 단일화 초기부터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중 대표적인 연맹이 바로 축구협회이다. 실리콘밸리 축구협회 김준한 회장은 단일화 초기시점부터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 단일팀이 출전할 경우 오렌지 카운티를 비롯한 4개 지역의 연맹에서 함께 경기를 치루지 않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며 단일팀 출전의 어려움을 피력했다. 이에 나기봉 회장은 “각 지역협의회와 재미대한체육회, 조직위원회 모두에게 단일팀과 관련된 사항을 승인 받았으며 경기를 치루는 데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대응해왔다. 양 축구회는 이에 순응, 순조롭게 선수선발전을 치루는가 싶더니 끝내 조율에 실패하고 만다. 실패요인 중에는 양 축구회가 단일팀 구성을 위한 선수 선발안을 토의하던 중 벌어진 폭행사건이 영향을 미친 듯 싶다. 양 협회는 지난달 중순 산호세 시골집에 모여 각각 15명씩 선수를 선발하자는 데까지 의견일치를 보는 듯 싶었지만 협의과정에서 오고간 거친 말들과 그 과정에서 실리콘밸리 축구협회 임원이 샌프란시스코 축구협회 회원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만다. 이 사건 이후 샌프란시스코 축구회는 구두사과가 아닌 공식 서면 사과와 실리콘밸리 체육회에게 실리콘밸리 축구회의 징계를 요구하는 등 감정이 격해져 사실상 단일팀 구성은 이미 어려워진 상태였다. 축구협회가 유독 다른 연맹과 달리 합의점을 찾지 못한 이유 중에는 ‘축구는 지역의 자존심’이라는 양 협회의 양보없는 줄다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육회의 경우 지난 미주체전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화려한 전력을 소유하고 있고 실리콘밸리 축구회는 같은 대회의 축구 우승팀으로서 두 팀이 선수선발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합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다는 얘기다. 여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양 축구회간의 골이 깊은 갈등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체육회 산하에는 각각 15개 이상의 경기연맹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연맹이 단일팀 구성을 위해 차질없이 선수선발을 진행하고 있는데 유독 축구회가 말썽을 일으킨다고 해서 단일팀 결렬사태까지 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차라리 축구팀을 배제시킨 상태에서 출전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이에 대해 신민호 회장은 “축구는 지역 체육의 자존심이며, 집안으로 따지면 장남 격”이라며 “축구팀없이 미주체전에 참가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실리콘밸리 체육회의 경우 상당수의 임원진이 축구회 소속이어서 그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결렬 이유중의 하나라는 지적도 있다. 출전 보류 의견도 조심스럽게 대두? 단일팀 파기로 인해 양 체육회에게 당장 시급한 것이 기금 확보이다. 양 체육회는 단일팀을 출전시킬 경우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밝힌바 있다. 양팀이 각기 출전할 경우 협회당 7만 달러의 경비가 드는 것에 비해 단일화할 경우 많은 부분의 경비 절감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 당시 양측의 추산이었다. 하지만 단일팀이 결렬된 현재 양팀은 각각 경비를 조달해야 하는 현실이다. 게다가 대회일정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와 비행기표가 한달 전보다 무려 2배가량 올라 더 큰 재정적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실리콘밸리 체육회의 장길현 사무총장은 “미주체전 출전경비를 5만 9천달러로 예상하고 있고, 6월 3일 현재 3만달러의 기금이 확보된 상태”라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 체육회도 8만달러의 경비를 예상하고 있으며, 현재 2만 5천달러의 기금을 확보한 상태라고 나 회장은 설명한다. 단일팀이 결렬됨으로써 양 협회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이런 현실은 결국 한인사회의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양 체육회는 기금 확보와 선수 선발 등을 위해 발 빠른 행보를 하고 있지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체육회 안팎의 지적이다. 체육회 모 인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까지 모여진 기금은 지역 한인사회의 체육 발전을 위해 쓰고 미주체전 출전을 한 회 건너뛰는 것도 한가지 방법 아니겠느냐”며 “단일팀이 깨지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 동포들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꼭 출전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며 출전 보류에 대한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보이기도 한다. 화합 이루지 못한 체육인들 각성해야 지난 2001년 휴스턴 대회에 앞서서도 양 체육회의 단일팀 구성안이 제기되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고, 올해 또한 조인식까지 가지면서 거창하게 시작된 단일팀 협상이 끝내 경기출전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출전 경비 절감’, ‘체육인들의 화합’이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단일팀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배경에는 양 지역 체육인들간의 반목과 지역 이기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인 듯 싶다. 지난 3월에 가진 조인식에서 나 회장은 “한번 결정하기가 어렵지 결정하고 나면 하나 되어 실천하는 것이 체육인들의 특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동포사회의 환영을 받으며 ‘어려운 결정’을 했으면서 또 아무 거리낌없이 쉽게 파기하는 체육인들. 한인 동포들은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양 체육회 관계자들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일요시사 특별취재팀
2003-05-29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한국학교
한나라의 장자방 장량 그리고 군사 한신의 지략에 마침내 완전포위당하고 만 초나라의 ‘항우’. 불안하기 그지없는 깊은 밤, 사방을 겹겹이 에워싼 한나라 군사 속에서 느닷없이 애절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흘려 나온다. 그 고도의 심리작전에 말려 얼마남지 않은 군사들은 싸울 의지를 상실, 하나 둘 무기를 버리고 탈영해 버리고...그토록 사랑하던 ‘우미인’마저 종말을 예감한 듯, 자결을 택한다. 힘이라면 산이라도 빼어 던질 만하고, 기(氣)라면 세상을 덮을 만큼 웅대했다는 ‘역발산-기개세’ 초패왕 항우, 그는 한주먹감도 안되는 한고조 유방에게 이렇게 철저히 농락당한 채, 끓어 오르는 울분을 참으며 파란만장 했던 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지난 월요일, 상항한국학교의 기금모금 파티 관련 기자회견 도중, 문득 초한지의 이장면에서 유래되었다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물론 항우의 그 절박감이나 비통함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30년이라는 역사와 전통이 무색하게 발전은 커녕, 하루하루 뒷걸음을 칠 수 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에 빠진 상항한국학교의 처지가 왠지 이 고사성어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북가주 한인2세 교육의 선봉장 역할을 해오던 상항한국학교... 자라나는 우리 2세들을 위해 30년이라는 만만치 않은 세월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쏟아 부은 이 학교가 요즘 그런 노고가 무색하게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로웰 고등학교를 빌려 매주 토요일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상항한국학교는 현재 이사비, 등록비를 모두 합쳐도 연 1만달러 넘는 적자를 내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지난 몇년 사이 3배가 넘게 뛴 학교사용료와 보험료, 불경기로 인한 동포사회의 후원금 감소...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를 더더욱 ‘사면초가’로 내몰고 있는 것은 바로 코앞에 우후죽순격으로 문을 연 교회내 한국학교들이다. 10분 거리도 안되는 지척에 세 개나 되는 교회학교의 난립으로 상항한국학교는 엎친데 엎친 꼴로 학생수 ‘격감’이라는 타격까지 입고 있다. 적자액을 메우기 위해 학부모회와 학교관계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학교는 숙원사업이었던 자체건물구입을 위해 고이고이 모셔 두었던 쌈짓돈까지 꺼내 사용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상항한국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전부터 뜻 있는 교육관계자들에 의해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기 위한’ 지역별 한국학교통합론이 제시되어 왔지만 실제로 ‘통합론’에 결실을 보고 있는 미주 일부지역에 반해 북가주의 난립현상은 해가 갈수록 더 해만 가고 있다. 그리고 계속되는 이러한 교회한국학교 난립은 힘들게 힘들게 ‘제대로 된 학교’로 가는 기틀을 잡아 가고 있던 몇몇 한국학교들 마저도 발전은 커녕 답보 내지 뒷걸음질을 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곳 저곳의 교회에 소규모 한국학교가 생겨나 얻어지는 이득이 전혀없다고 , 또 무조건 소규모 교회한국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사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양보다는 질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될 수 없다. 30년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매 학기 커리큘럼을 짜고, 17명의 정교사와 보조교사를 두고, 아이들의 실력에 따라 십여 반으로 나누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사연수회와 본국 문광부의 도움으로 교사교육에 힘쓰고, 각종 세미나를 통해 더 나은 교육자료 정보와 구입에 힘쓰는 제대로 된 한국학교와 천차만별의 모국어 실력을 가진 아이들을 대충대충 나누어 한 반에 모아 가르치는 소규모 교회학교와는 아무리 몇몇 실력 있는 집사님들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분명 ‘교육의 질’, 그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잘못된 교육은 아이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국어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고, 단순히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고 해 아무런 준비와 공부없이 칠판 앞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비록 정규학교는 아니지만 한국학교는 우리 2세들에게 한글교육과 더불어 민족정체성을 함께 심어줘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짊어지고 있는 유일한 2세 교육기관이다. 무분별한 소규모 교회한국학교 난립에 대해 일부에서는 ‘신도를 늘이기 위해서’라는 눈총을 보내고 있다. 기자는 한국학교의 산파역할을 해냈던 한인교회들이 모두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에서 한국학교를 열고 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주일학교로 만족하고, 제대로 된 우리 2세 교육기관의 발전을 위해 이젠 통합론에 함께 힘을 실어 주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한국학교 보내도 그만, 안 보내도 그만’또’아무데나 보내면 되지 뭐”라는 학부모들의 잘못된 사고의 전환도 필요해 보인다. 이동혁
2003-05-23 세월 이야기(쉰 둘)
노 대통령이 이곳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고 귀국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소의 대미관과 다른 언행과 행동을 보며 “납작 엎드렸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거시적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인식에 따른 변신”으로서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귀국하자마자 한총련이란 불법이적단체(?)의 시위 때문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 23주년 기념식장에 “뒷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빠져나오는”참담한 대접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국회의원이란 높으신 분들(노 대통령과 회담하면서도 앉아서 대통령을 맞이해야 격에 맞을만큼)이 가드레일을 넘어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볼상스러운 사진도 함께 말입니다. 목에 핏대 올리고 목소리 크면 이기는 세상이 새롭게(?)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탑건 조종사처럼 항공모함에서 이라크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는 멋진 쇼를 연출할 때부터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더니만 급기야는 햇볕정책 운운하는 한국을 제외하고 중국, 미국, 북한 셋이서 북핵회담을 벌여 노 대통령의 입지를 상가집 개로 만들어 놓았을 때부터 예견된 일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가 지배합니다. 친노조 정책이 대통령의 이미지와 부합된다고 미리 각 정부부처에서 알아서 기더니 결국 물류대란의 씨앗이 되어 버렸고, 불법이적단체로 규정한 한총련의 수배자들을 아무런 법적근거없이 사면운운하다가 이번에 된통 귀싸대기를 맞은 꼴인데 이 역시 이미 식자들간에는 예견된 불상사입니다. 노조의 목소리가 커지고 각종 이익 단체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면서 쫄아들어가는 것은 힘없는 국민들의 어깨와 힘없는 대통령의 위상인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굽실거리고 이눈치 저눈치 봐야 살아갈 수 있는 자리가 서민 대통령 자리인가 싶습니다. 그러다가도 아차 잘못하면 청문회에 나가서 이당 저당 철새처럼 날아다니며 선량자리 유지한 정치 잡초들에게 멱살 잡힐까봐 퇴임 후에는 두문불출 전전긍긍해야 하는 안타까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사에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한번 원칙을 깨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인과의 법칙입니다. 노사간의 갈등에서 언제부터인가 변칙이 통하는 세대가 됐습니다. 관 둘러메고 사업장을 몇 달씩 금전하게 해도 “무노동 무임금”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있는 자가 손해보는게 낫다는 식의 동정론에 기인한 잣대가 대통령의 손에 들렸으면 언젠가는 애꿎은 국민들만 볼모가 되기 안성맞춤입니다. 굴욕적인 한미정상회담 반대를 외치는 한총련의 천여명 시위대의 “개구멍으로나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라”는 식의 정문봉쇄에 15개 중대 이천명의 경찰병력이 속수무책 우왕좌왕이었다는 보도에 아연실색할 지경입니다. 시위대에 대한 진압, 처벌, 대응에 대한 무원칙 때문에 복지부동하고 서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간첩이 횡행해도 어느 틈엔가 주적개념이 없어져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 현 상황이 원칙없는 햇볕정책의 적용 때문이란 특별검사의 수사상황이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작금입니다. 원칙에 입각한 것이 비록 경직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혼동과 무질서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건강식품들이 온갖 거짓말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떴다 사라졌다 합니다. 일본에서 만들었느니 중국에서 만들었느니 하면서 은근히 사대주의적 권위를 내세워서 장사속을 차리느라고 혈안이 된 요즘 그런 종류의 건강보조식품(선전은 기적의 약품으로 불치병, 난치병 등 못 고치는 게 없다고 함) 한두개 먹지 않는 사람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단순합니다. 밥 잘 먹는데 소식하고 잠 충분히 자고 시간 맞추어 배변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에다 세상살이에 너무 욕심갖지 않고 자족하는 것인데 이 원칙 무시하면 가뜩이나 편향된 건강식품의 기미(기운과 맛)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치판이고 장돌뱅이판이고 돌팔이 판이고 그들 나름대로의 원칙을 고수해서 애궂은 사람들 피해 입는 경우가 안생기는 세상은 아마도 피안의 세계나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삼보한방의료원 원장 최은환 한의사 일요시사제공
2003-05-22 산호세 한인회에 대해서
자유 게시판에서 실린 내용입니다. 저에게 이러한 기회를 주신 sfkorean.com에 감사드립니다. 한인회 사무실이 몇년전만해도 엘카미노에서 지역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한인 권익을 위해서 시민권 서류를 구비하고 오는 동포에게 친절한 안내를 해 주던일이 기억이 납니다. 6년전에 친구와 함께 한인회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해서 자비로 하드드라이브를 교체해주기도 하였읍니다. 한인회가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린 산호세 지역을 떠난것 같읍니다. 봉사한다는 마음이 없는 몇몇 사람들의 개인모임이 됬는지 아니면 지역 한인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지… 멀리 타국에와서 이민생활을하는 우리동포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순수한마음으로 초기 회장단들이 정성들여 이룩한 산호세 한인회가 이제 점점 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있읍니다. 많은 지역동포들은 교회의 일이 이민생활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며 동포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없읍니다. 기독교면 어떻고 천주교, 불교면 어떻습니까? 한인들이 미국에서 최고액수의 기부금을 낸다고 하는데 자신의 종교를 제외하고는 인색하기 그지없읍니다. 관심도 없고…. 이종문회장이 큰 금액을 기부하여 한인의 위상을 높힐때도 입만 살아서 뒤에서 떠들던 많은 사람을 보았읍니다. 이종문회장이 전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읍니다. 하지만 그분만큼 이곳 한인사회를 빛 낸분이 몇이나 됩니까? LA 폭동사건이후 한인사회가 분연히 일어나더니… 냄비가 식었읍니다. 미국이란 사회는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종별로 단합된단체 및 협회가 있읍니다. 흑인, 유태인, 맥시칸, 중국인, 인도인…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낄땐 이미 늦을 수 도 있읍니다. 지금부터 우리모두 한인회의 정상화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작고 큰일이 있을때 우리와 우리의 2세를 도와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했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3-04-27 한인 코메디언 마가렛 조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아시아 계 헐리웃 명사 마가렛 조 마가렛 조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계 코메디언,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개그우먼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레 조는 196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3일만에 노동허가를 취득하지 못한 아버지가 귀국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마가렛을 키울 능력이 없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는 한국으로 보냈다. 학교공부에 관심이 없던 마가렛(0.6 GPA)은 Lowell High School에서 퇴학 당한후 Performing Arts 학교인McAteer High School로 전학 했다. 16세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책방위에 소재한 Rose & Thistle에서 처음으로 스텐드 업 코메디를 공연한 이후 할리웃의 유명인사가 되는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된 1994년의 텔레비젼 코메디 `All American Girl.`은 그녀를 미국의 스타 대열에 올려 놓았으나 각본 및 감독의 연출 부족에 따른 시청율 저하로 방송중단 사태를 맞으면서 마가렛 조는 마약에 빠져들며 방황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재기한 마가렛은 I`m the One That I Want 및 Notorious C.H.O.를 성공시키면서 재기에 성공 했다. 아래의 내용은 마가렛 조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DP: 마가렛 조씨의 모든 공연은 늘 신나고 재밌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특별히 더 좋아하는 공연장소가 있습니까? CHO: 특별히 좋아하는 공연 장소는 없고, 저는 공연하는데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많은 팬들이 제가 공연할 때면, 수시로 찾아옵니다. 이들 팬들은 제게는 제 2의 가족이라 할만큼 소중합니다. 저는 그 분들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제 공연을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인 만큼 충분한 가치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 라이브 쇼를 보기위해 사람들은 시간과 돈 등 꽤 많은 것을 투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DP: 지난 번 공연 중에 마가렛 조씨는 부모님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고 또, 마가렛 조씨의 영화 [NOTORIOUS CHO] “악명높은 조”에도 부모님이 출연하셨는데요, 부모님 이야기좀 들려 주시겠어요? CHO: 실은 정말 재밌는 일인데요, 제 부모님은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잘 모르십니다. 그분들은 제가 유명인이라는 사실에 그저 즐거워 하신답니다. 전 올 여름에 결혼할 예정인데요, 제 아버지께서 제 약혼자를 처음 만나셨을때 글쎄, 우리 딸을 좀더 좋은 아내가 되도록 잘 가르치지 않아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개나 고양이처럼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전 웃으면서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고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저는 부모님과 매우 가깝게 지냅니다. 전 제 부모님을 그냥 단순한 부모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제 부모님들 앞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행동양식을 바꾸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들어내고, 누가 보든지 간에 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표출하는데 자유롭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은 제 농담중 상당부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시거든요? 그러니까 그점이 바로 절 구해준답니다. DP: 한국을 방문하신지가 얼마나 됩니까? 한국에 가서 혹시 문화적 충격같은 건 없었습니까? CHO: 한국을 방문한지가 약 25년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이상했던 건 사람들이 제가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요, 다들 금방 알았어요. 한국에서 공연을 가지면 좋겠는데 실은 코메디 공연이란 그 나라 특유의 문화적 특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예를 들어 영국이나 호주 같은 나라에서 조차 , 유머가 그대로 전달되기가 꽤 어렵거든요. 미국에서 통하는 농담이 캐나다에선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DP: 마가렛 조씨는 미국 연예계에서 몇 안되는 아시아계 연예인 가운데 한 명인데요, 어떻게 해서 연예계에 진출하셨습니까? CHO: 꽤 힘들었습니다. 많은 오디션을 거쳐야 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저는 지금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수입도 올리고 있습니다. 전 제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도 있고, 창의력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저는 배우가 아닙니다. 저는 코메디언입니다. 저는 십대때부터 코메디를 시작했습니다. 전 코메디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20년쯤 후, 전 제가 한 일에 대해 매우 만족할 것라고 생각해요. DP: 끝으로 마가렛 조씨는 앞으로 어떤 공연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CHO: 전 코메디를 사랑합니다. 전국 순회 공연도 계속 할 것이고, 글도 쓰고, 영화도 두 편 제작할 겁니다. 하나는 이번 순회 공연에 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인생 여정에 관한 기록영화입니다. 꽤 흥미로울 겁니다.
2003-04-04 뉴스위크에서 선정된 유망 디자이너 벤자민 조
쿠퍼티노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벤자민 조(사진, 26)가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디자이너 3명중에 하나로 뽑혔다. 지난 1월호 패션면에 게재된 벤자민 조 기사 내용에 따르면 벤자민을 포함한 이들 영 디자이너들은 현재 부와는 떨어져 있지만 이들이 가진 재질은 부의 가치를 넘어섰다고 평가하고 이들이 가진 예술적인 취향과 순수성을 자세히 소개했다. 특히 벤자민 조는 이들 유망 디자이너중 가장 나이가 어리면서도 창의적인 예술과 섬세성이 놀랍다면서 벤자민의 옷 한점이 4,000달러에 팔리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옷들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거기에다 고객도 한정이 되어 있어 재정 면에는 여전히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뉴스위크지’외에도 벤자민 조의 인터뷰와 작품이 게재된 잡지는 ‘보그’외에도 수많은 패션 잡지에서 볼 수 있다. 미국 ‘보그지’는 서슴없이 그를 테스 기버슨, 소피아 코코살라키와 함께 가장 떠오르는 신인 디자이너로 선정하기도 했고 ‘하퍼스 바자’도 ‘Big Ben’이란 타이틀 아래, 그의 창의력을 찬사하는 수식어들로 가득한 기사를 게재했었다. 피시 테일의 스커트와 재킷, 롱 재킷을 정교하게 잘라내 변형시킨 미니 드레스, 풍성하게 소매를 부풀리고 등을 깊게 판 재킷 등,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려운 독특한 테일러링의 수트를 술로 땋아 내린 드레스들은 벤자민 패션의 트레이드 마크. 블랙, 화이트, 퍼플로 한정시킨 컬러 속에서 꾸뛰르적인 테크닉과 로맨티시즘을 보여 주었던 은 그의 의상은 뭉크의 그림처럼 섬뜩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평이다. ‘보그’ 잡지에는 그의 명성과는 달리 그의 작업실은 사뭇 다르다고 표현했다. 10평도 채 되지 않는 크기, 엉성하게 짜여진 큰 나무 작업대와 몇 개의 재봉틀이 전부이며 컬렉션 준비를 위해 잠시 친구의 작업실을 빌려 쓰는 가난한 디자이너이지만 그래서 그의 순수성과 창의성은 더욱 가치가 있다고 이 잡지는 추켜세웠다. 그러나 가탈스런 입맛에 독설을 서슴치 않는 뉴욕 패션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얻고 있는 그이지만 역시 더 절실한 건 작품 콜렉션을 개최하는데 필요한 스폰서의 호의. 벤자민 조는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쿠퍼티노 린부룩 고교를 졸업한 뒤 뉴욕에 있는 유명 디자인 대학인 파슨 스쿨에서 수학했고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아버지는 서울공대와 MIT 출신으로 마운틴 뷰 NASA에 근무하고 있는 조영충 박사, 어머니는 현재 한국에서 오페라 가수이자 경원대학교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김성애씨. 어릴 때 첼로를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어머니가 즐겨보던 ‘보그’지를 통해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의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망과는 달리 패션 디자인의 길을 선택했던 벤자민은 “어려움은 많았지만 후회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자신대신 누나가 신경과 의사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이 뉴욕 패션계를 비상하고 있는 벤자민 조. 벤자민 조의 전체 컬렉션을 보길 원하면 웹사이트 www.style.com을 클릭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