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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27 ] 오이코스대학교 총기난사 사건 그 후 6개월

2012년 4월 2일, 캘리포니아주 최악의 총기난사사건이 바로 우리 곁에서 있었다. 오클랜드 공항입구에 위치한 한인이 운영하는 오이코스대학교에서 간호대학 휴학생인 한인 고수남(미국명 One L. Goh)씨가 수업중인 동료학생 7명을 총격으로 사살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 전역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고, 북가주 한인사회는 범인과 희생자 중 2명이 한인이라는 사실에 한동안 공황상태를 경험했다.

고수남씨가 수감되있는 알라메다 교도소



그로부터 정확히 반년이 지난 지금,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해서 발생이 됐고 현재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았다.

기획특집 시리즈 1은 총격살해범(형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피의자) 고수남이 수감중인 더블린 소재 산타리타 형무소(Alameda county jail)를 직접 방문하여 2회에 걸친 인터뷰 내용을 언론사 최초로 독점 게재하며, 다음 호 에서는 피해자인 오이코스대학교 관계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 사건 후에 겪은 일들과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을 점검해 본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 동안 언론에 보도된 대로 같은 간호학과 학생들이 자신을 왕따 시켰고, 학교 측에 요구한 수업료반환이 이뤄지지 않아 홧김에 범행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씨의 주장에 의하면 실기시간에 본인 혼자만 남겨두고 다른 학생들은 휴식을 취한 적이 많았고, 시험시간에 동료학생들이 부정행위(컨닝)를 하는 것을 교수들이 묵인해 줬다고 주장했다.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인 고씨는 여러 차례 교수들에게 항의를 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업료 반환에 관해서는 본인이 총 13,500달러의 수업료를 냈지만 중도에 휴학을 했기에 6,000달러 정도는 되돌려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학교 측에 수차에 걸쳐 수업료 반환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학교관계자들은 학교규정상 돌려줄 수 없고 다시 학교에 복학하여 수업을 들으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사건 당시 정황은 어떠했는가?

고씨는 휴학 후 건설현장 등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해왔으나 아파트 렌트비를 내지 못해 쫒겨나는 등 경제적 압박으로 시달렸고, 범행 전 약 1개월간은 거의 본인의 차에서 생활해 왔다고 고씨의 부친 고X남씨는 증언했다. 또한 1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동생 고X한의 묘지(버지니아 엘링턴국립묘지)에 운전하여 갔다 오던 중 억울하게 교통위반 스티커를 받았는데, 이에 대한 벌금이 미납되며 누적되어 독촉장이 계속 날아왔다고 한다.

극심한 경제적 위기상황에 처한 고씨는 사건당일인 4월 2일, 학교측에 최종 담판을 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한 달 전에 구입한 권총을 휴대하고 학교를 찾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고씨는 처음에 엘렌 서블렌 간호학과장이나 김원자 전 부학장(당시 그녀는 이미 몇 개월 전에 학교를 그만 둔 상태였고 고씨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둘 중에 한 명에게 수업료를 돌려받으려 했다.

간호학과 사무실로 들어간 고씨는 직원인 캐더린 핑에게 교수들의 소재를 물었고, 다른 학교로 강의를 가 있던 엘렌교수는 방에 없었다. 하지만 교수실에 불이 켜져 있고 문이 반쯤 열려있는 것을 본 고씨는 캐더린 핑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총을 꺼내 들어 먼저 캐더린 핑을 쐈다. 이성을 잃은 고씨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강의실로 들어가 학생들에게 전부 일어서 벽에 가서 서라고 소리를 쳤으나 뒤쪽에서 누군가 비웃는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화가 치밀어 오른 고씨는 그때부터 학생들을 향해 총을 연달아 발사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고씨는 그때를 연상하며 본인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고, 7명이나 사망한 줄도 당시엔 몰랐다고 했다. 그는 또 평소 본인을 잘 따르던 동료학생인 김은혜(미국명 그레이스 김)씨가 본인의 총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더욱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1차 공판에서 본인이 무죄라고 주장했던 것은 국선변호인이 그렇게 말해야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하여 시키는 대로 한 것이라며, 자신은 “빨리 죽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런 이유로-재판부에서 받아 들여 질 줄 모르지만-변호사를 해임하고 앞으로 있을 공판에서는 본인이 직접 변호를 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

고수남의 학교생활은 어떠했는가?
오이코스대학 김종인 총장, "피해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


신학대학을 시작으로 음악대학, 간호대학, 한의과대학을 개설하면서 북가주 한인들의 전문직업양성소 역할을 감당해오던 오이코스대학교. 한인이 운영하는 북가주 내 유일한 종합대학으로 계속 성장을 해가던 이 대학교에서 끔찍한 집단 사살극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학교행사 취재와 광고상담을 위해 오이코스대학교를 자주 방문했던 본 기자도 4월 2일 아침, 총기사고가 났다는 제보로 사건현장을 찾기 전에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사건발생 6개월이 지난 지금 외형적으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간 학교를 찾아 김종인 총장 등 학교관계자들로부터 사건 당시와 현재 피해자들의 보상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고수남이 다니던 간호대학은 어떤 곳인가?
2004년 LA 쉐퍼드대학 분교로 시작한 이 대학은 2007년 오이코스대학교로 독립했고, SEVIS(국토안보국)으로부터 I-20 발급인가를 받은 오이코스대학은 종합대학교의 꿈을 꾸게 된다. 음악대학을 비롯해 간호대학, 한의과대학을 연이어 개설하면서 한인학생은 물론 타인종 학생들이 이 학교에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간호대학의 LVN(Licensed Vocational Nurses)코스는 부족한 간호사를 찾는 병원 및 의료기관들의 현실과 맞물려지며 인기가 높았다. 인근의 다른 간호대학에 비해 학비가 저렴하고 단기간에 학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오이코스 간호대학은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학생 대부분이 한인을 비롯한 소수계민족 출신 학생들이다 보니 직장을 다니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자체시험을 엄격히 치루어 LVN면허시험 합격률을 높이려는 타 간호대학과는 다르게 느슨한 학교행정이 신설학교인 오이코스간호대의 합격률을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대학 내에서 집단 따돌림과 등록금반환 시비가 있었는가?
고수남과 같은 과 학생이었던 한 한인학생은 고씨가 학기초에는 교수들에게 칭찬을 자주 받고, 반장(기수대표)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받았다고 말한다. 일부 언론들이 제기한 고씨의 영어미숙에 관해서는, 미국 시민권자인 고씨가 오히려 다른 소수계민족 학생들보다 영어구사능력이 뛰어났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나이차이가 20년 가까이 나는 동료학생들과의 의식차이, 이혼남이던 고씨를 바라보는 20대 여학생들의 경계심, 사사건건 교수들과 언쟁을 벌이는 고씨의 다혈질적인 성격 등이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하지 않았겠느냐는 학교 직원들의 설명이다.

등록금 반환에 관해서 김종인 총장은 간호학과장이나 해당직원의 보고가 없어서 사건 후에나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김 총장은 "3학기에 총 19,000달러의 전체등록금 중 고씨는 2학기를 다니다가 그만두었기에 그가 이미 냈던 2학기까지의 등록금 13,500달러는 학교가 반환해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고씨의 등록금 반환문제는 총격사건 첫번째 희생자인 간호학과 행정직원 캐더린 핑이 담당했으나 그녀가 사망함에 따라 그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간호학과의 한 한인교수는 등록금 반환문제에 관해서 "고씨는 물론 고씨의 아버지도 학교를 찾아와 등록금 반환을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보상문제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김종인 총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학교가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고 전제한 후 "강의실 등 파손건물 수리비, 사건 현장에 있었던 재학생들에게 심적 위로보상 차원에서의 등록금 삭감, 부상자들의 병원비, 학사일정 변경으로 인한 수입감소, 변호사수임료 등 피해규모가 80만 달러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희생자 중 학교직원이었던 캐더린 핑에게는 워컴(종업원 상해보험)에서 이미 30만 달러 규모의 보상금이 지급됐고, 나머지 희생자들은 개인 변호사들을 통해 보험회사와 현재 보상이 협의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 내 유사 사건의 법원판례를 볼 때 아마도 내년쯤에야 해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총격사건 후 세계 각 지에서 보내오고 있는 위로금은 현재까지 9천 달러 정도가 모금되었고, 이 금액은 적절하게 희생자들에게 배분될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총장은 "학교는 피해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3.
깨지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

-모두가 피해자

오이코스대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은 거의 다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정착하고 있던 이민자들이었다. 한국인 2명은 물론 티벳, 필리핀, 남미출신의 이민자들은 불경기에 조금 더 안정된 직업을 찾기 위해 간호사의 길을 가던 중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밤엔 레스토랑이나 공항에서 경비원 등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가던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실천자들 이었기에 주위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오이코스대학교 역시 이런 학생들의 직업교육장소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오다가 이번 사건으로 대내외적 이미지 실추와 재정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피의자 고수남의 가족들도 졸지에 같은 죄인의 신분으로 숨을 죽이며 이웃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마켓에서 노동일을 하며 노인아파트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고수남의 부친 고 모씨는 극히 제한된 교도소의 면회시간에 맞춰 아들의 얼굴을 보러 매주 새벽에 교도소 면회실을 찾는다.

이들 모두에게 그 상처는 어떻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치유될 수 있을까?

-조승희, 고수남은 계속 나올 수 있다.
청소년기의 자녀를 둔 부모치고 자녀교육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학업성적은 둘째고 일단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호소하는 한인들이 많다. 영어만 쓰려하는 자녀와 한국어가 편한 부모 사이에서 진지하고 구체적인 대화가 이뤄지기란 이민사회에서는 요원하기만 한 부분이다. 그래서 자녀가 지금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어떤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파악하기란 자녀가 선뜻 나서기 전에는 대체로 알 수 없다고 1세대 부모들은 말한다. 특히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1.5세대들에게 미국의 문화와 영어에 익숙해 지기 까지는 많은 스트레스와 분노가 쌓여간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지적하고 있다.

2007년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와 오이코스대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고수남도 어떻게 보면 이민사회가 낳은 비극의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아시안계 미국인들로서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온 이민자의 자녀들이다. 미국 내 학교에서의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로 항상 외로움과 씨름했으며, 일터에서 힘들게 일하는 부모에게는 걱정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모든 고민을 안으로만 삭혀온 잠재적 시한폭탄들이었다. 요즘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분노 조절'의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았거나, 마음을 놓고 상담을 할 친구나 멘토, 혹은 종교인들이 그들 곁에 있었다면 두 비극적인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오늘도 우리의 자녀들과 그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흥얼거리며 밤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노 조절에 실패한 제 2의 조승희, 고수남은 어디에선가 총을 매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총기휴대의 두 얼굴
국민 자신의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 허용되고 있는 미국의 총기휴대가 이와 같은 총기사고만 나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오이코스대학교 사건 이후에도 몇 차례의 총기난사 사건이 더 발생하면서 총기휴대 허용문제는 미국의 정치적인 민감한 사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고수남의 경우, 버지니아에서 그의 부친과 함께 마켓을 운영하면서 총기를 자연스럽게 접해 보았다고 한다. 그는 또 이번 사건에 사용한 권총은 "학교(오이코스 간호대)에 여러 번 찾아가 항의를 해서 혹시 자신이 (요주인물로 등록되어)총기를 구입할 수 없게 되었는지 확인해 보려고 사 두었던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리한 흉기나 칼을 가지고 놀다 보면 언젠가는 조그만 상처라도 나듯이, 총기는 가지고 있으면 순간적인 판단착오나 갑작스런 분노가 일어날 때 주위사람이 모두 불행해 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처치유를 위한 노력들
오이코스대학교 음악대학 김종진 학장은 사건 당시 학교 내에 있었던 현장 증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사고 후 학교의 대외창구와 희생자들을 위한 릴레이 추모음악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매스터코랄’ 합창단의 지휘를 맡고 있기도 한 그는 내년 4월 오클랜드 시와 함께 대규모 추모음악회를 계획하고 있다. 주류사회 음악단체들과 함께 사건 발생 1주년을 기념하여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커뮤니티 화합을 위한 야심 찬 콘서트계획에 각지에서 후원과 참여가 잇다른다고 한다.

유족들에게 그때의 악몽을 되살리게 해주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으나,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발생하지 말자는 의미의 '평화와 화합의 음악회'로 기획되어지고 있다.

얼마 전 고수남의 부친 고 모씨와 만나 최근의 심경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들이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사형판결만은 피하게 해주고 싶다는 늙은 아비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그는 "다 키운 자식들을 먼저 보낸 희생자들의 부모에게 죽을 때까지 대신 사죄하면서 살겠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박성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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